로잔 운동

개종주의를 넘어선 사랑과 섬김의 전도 (방선기)

희년선교회 2024. 9. 3. 14:55

개종주의를 넘어선 사랑과 섬김의 전도

 

 

방선기 목사

(직장사역연구소 대표)

 

1974년도에 출범한 로잔 운동이 복음주의 교회를 향해서 던진 충격적인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만이 아니라 현실 사회문제에 책임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그래서 로잔회의를 개최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82년도에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Consultation on the Relationship Between 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 회의에서 내놓은 결론은 이 두 사명이 새의 두 날개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어떤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는 전도가 더 중요하지만 현실 상황에서는 사회참여가 우선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 이후 50년이 지나서 이제 네 번째 회의를 열게 된다. 그런데 이 회의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50년 전에 있었던 논란이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전도의 우선순위를 강조하면서 현재의 로잔운동에 비판적이 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총체적인 선교를 강조했던 로잔운동이 과거로 퇴행할 것을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신학적인 차이 때문에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기가 힘들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 복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전도가 정말 주님이 원하고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인지 돌아보고 혹시 부족했던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보완하면서 이 시대에 맞는 전도를 새롭게 정리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복음의 총체성을 다시 한번 회복해야 한다. 이번 로잔 회의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1974년도의 로잔 운동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번 로잔 회의에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1. 전통적인 복음주의자의 전도

 

모태 신앙인 나는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예배참석은 기본이고, 성경읽기나 기도, 기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거의 다 실천했다. 그런데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전도였다. 성인이 되기까지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를 교회로 인도한 것이 전부였다. 내성적인 성격인지라 전도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약간의 열등감까지 갖게 되었다.

 

다행히 대학에 들어와서 선교단체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하게 된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 접근해서 복음을 전했던 그 날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이후로 나의 신앙은 적극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갖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기대하는 만큼 전도를 잘 하지 못했고, 전도를 해도 남들처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신앙이 위축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에게는 전도의 열정과 전도의 열매가 곧 내 신앙의 바로미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도의 실천은 직장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했다, 그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양육도 했다. 나름대로 직장에서 사역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 나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더 강한 분들이 있었다. 그들은 직장에 나오는 목적이 전도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려고 온다고 드러내놓고 이야기 했다. 그 사람을 보면서 한편으로 전도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일터 사역을 하면서 그것이 전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전도는 중요한 사역이지만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전도는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 크리스천이 일터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맡겨진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이고, 일터에서의 삶을 통해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도는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가 되어야 한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전도가 열정을 가지고 임해야 할 사역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 전도의 열정이 식게 되면서 전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상황이 전도하는데 불리하게 되면서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교회의 사명인 전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열정을 회복하려고 하거나 그런 상황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도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서 우리의 믿음에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대답해주는 일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벧전3:15) 동시에 우리가 익숙했던 복음과 전도에 부족했던 점은 없는지,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한 것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전도의 변질

 

전도는 기본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 얻게 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전도가 종교적인 차원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서 조금씩 변질이 되었다. 이는 이미 19세기 요한 블룸하르트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가 지적했던 바이다. 이들은 당대의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가 지나치게 개인의 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들은 전도와 선교의 개인의 개종을 넘어서 보다 하나님 나라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도를 개종으로 오해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대방의 종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도를 받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도의 목표가 아니고 전도 자체는 더더욱 아니다. 전도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자들이 종종 오해를 한다. 당사자가 예수를 믿으면 전도에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전도를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전도를 상대방을 개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다. 전도를 한 대상이 예수를 믿든 그것을 거절하든 모든 전도에는 실패가 없다. 상대가 믿기로 결단하면 거두는 전도에 성공한 것이고 상대가 거절했더라도 복음을 전했다면 그는 뿌리는 전도를 한 것이다.(4:36-37) 상황에 따라서는 예수를 믿기도 했지만 드러내어 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모슬렘이나 힌두교 사회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도 모든 종교를 포용하려는 다원화 사회에서는 전도를 해서 상대방의 종교를 바꾸게 하는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둘째로 전도가 크리스천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나 종교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이다. 크리스천이 이웃을 향해서 사랑해야 하나? 전도를 해야 하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은 분명하다. 당연히 둘 다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나?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면 조금 복잡해진다.

 

종종 어떤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가 보여준 사랑은 진실된 사랑이 아니다. 크리스천이 개인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 사용한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원래는 전도를 하는 동기가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를 해야 하는데 전도하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가르친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명한 것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사랑장에서는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에 사랑이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1-3) 사랑 없는 전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세째로 전도는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늘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전도는 교회성장을 위해 필요한 전략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오늘날 전도의 가장 심각한 오해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어느 교회의 입구에 빈 자리를 채우라라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다. 이 구호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 구호는 정말 인격을 모독하는 구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로 나오게 하는 목적이 자기들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라는 것을 교회에 나온 사람이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것은 좀 심각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가 전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도는 전도받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도를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다른 교회에 간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까 전도의 열정을 독려하고 전도의 열매가 많아지기 위해서 각종 기발한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전도가 교회성장을 위해 필요한 종교마케팅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절대로 종교 마케팅이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3. 총체적인 복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담겨있다. 이것을 실감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던 죄가 사라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복음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전했던 복음은 바로 이 범주에 해당되는 것이다.

 

복음을 개인의 영혼과 관련된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 종교를 바꾸는 개종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오해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도도 하고 사회 참여도 해야 한다고 말하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전도와 사회 참여를 별개의 범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전도는 실은 사회 참여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즉 복음 전도를 좀 더 총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전통적인 의미의 전도와 사회참여가 실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르네 빠디야와 같은 이들이 이에 대해서 적절한 지적을 한 바 있다.

 

총체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 기존의 복음 전도 개념에 누락된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이다.(2:14)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담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 속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고, 자유인들과 노예들 사이에 막힌 담이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막힌 담이다.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담을 허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만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됨을 선포했다.(3:28)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라 할 수 없다. 사람 사이에 만연하는 차별을 철폐하려는 노력을 사회적인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복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또 하나의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1:20)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연 만물과의 관계도 회복시킨 것이다. 내가 전통적인 복음에 익숙했을 때 처음으로 자연환경이나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것들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그 문제가 복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복음 속에 내재된 문제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은 피조물이 썩어짐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 일에도 헌신해야 한다.(8:21-22)

전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사회참여는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복음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별해서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4. 예수님이 원하시는 전도

 

이런 한국교회 안의 문제점을 보다가 프랑스에서 미션 디모데라는 교회를 통해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 중에서도 전도와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사고에 젖어있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교회는 전도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전도 전략이란 것도 없다. 교회 내에 전도 훈련 프로그램이란 것도 없다. 그런데 교회는 일취월장한다. 72년에 시작해서 50년이 지났는데 벌써 프랑스 전국에 30여개의 지교회를 세웠다. 한마디로 전도의 열매가 풍성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전도는 하지 않는데 전도의 열매가 풍성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교회 사역의 핵심은 전도가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해오던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우한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를 공동체로 만들었는데 그 주된 목적이 불우한 이웃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 교회의 요절은 조금 의아하게도 지상명령이 아니라 이사야 586-7절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희 먹거리를 나누어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은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교회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저렇게 해서 그들을 전도하는구나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대표되는 목사님이 이렇게 잘라 말한다.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 출석하면 나오면 초코파이 줄게라는 태도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필요’(besoin)너희가 이 필요를 채워 주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일단 듣게 된 약자들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무슨 전도나 선교, 심지어 구제나 사회참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단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사역의 결과를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전도를 하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전도하도록 다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해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이들에게 관심사는 교회 성장이 아니다. 심지어 전도에도 관심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예수님이 하라고 한 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했을 뿐이다. 그런데 전도의 열매가 풍성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전도까지도 교회의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회에 주어지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 교회가 한국교회처럼 전도에 헌신하지 못한데는 프랑스 사회적인 상황도 요인이 된다. 프랑스는 공적인 장소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전도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도하는데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사회의 변화를 보면 사회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 프랑스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시점에서 미션디모데의 전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교회는 비단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뿐 아니라 프랑스 밖에 있는 나라를 위한 선교에 있어서도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선교지로 선교여행을 가서도 노방전도를 하거나 축호전도를 하기보다 선교지에 필요의 채워준다고 한다. 언젠가 청년들이 선교여행을 가서 한 주간 동안 선교사의 집을 수리해주었다고 한다. 그 선교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한 사역이 잠시 방문해서 행하는 종교 행사처럼 행한 전도보다 더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로잔 언약에서 강조한 전도와 사회참여의 이중 사명에 대해서 논한다면 이 교회에서는 당황스러워할 것 같다. 이 교회의 입장으로는 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분하는 것이 어색할 것 같다.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초대교회에서도 이 둘을 구분한 것은 어색했을 것이다. 후대의 교회가 이 둘을 구분했고,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그것을 더 견고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교회에게는 굳이 둘을 구분해서 말하더라도 둘 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이 로잔운동이 추구하는 총체적인 선교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