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운동

로잔너머 5차 심포지움 (김세윤)

희년선교회 2024. 3. 22. 22:08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에 대한 평가와 비젼 제시  

 

세윤

(서울 영동 교회, 2024. 3. 11)

 

1 : 지금까지의 로잔 운동 평가

 

* 본문 1 부에서 이탤릭체의 글들은 로잔 문서들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 Cape Town 결의)에서 인용하거나 요약한 것들이고, 정자체의 글들은 필자의 논평 (1 )이나 논설 (2 )이다.

* 1 로잔 문서들 인용 부분들에서 로마 수자 I, II, III 로잔의 3 대회들의 문서들를 지칭하고, 뒤이어 나오는 아라비아 수자는 그들의 영문판 쪽수를 가리킨다.

 

I. 로잔 1: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 대회 (Lausanne, Switzerland, 1974, 7)

 

로잔 언약

 

- 미완성 상태의 복음화 사명: 아직도 인류의 2/3 복음화되지 않았음. 복음을 인류에게 선포하여 모든 민족들을 제자 삼으라 분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150 국가들에서 교회의 대표들이 신앙과 결의를 천명하고 언약을 공포한다 (I.1).

- 전도의 정의: “전도 자체는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의 순종그의 교회의 구성원으로 포함되기세상 안에서 책임 있는 봉사하기를 포함한다 “ (I.5)

- 전도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에 바로 뒤이어, 로잔 언약은 교회가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여야 한다 천명하고, 지금까지 (복음주의) 교회가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가져왔음을 회개하고, 전도와 사회적-정치적 개혁활동이 둘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의무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가 주신 이웃 사랑의 의무에 근거한다. 그래서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형태의 소외, 억압,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도 함축한다 천명하며, “우리는 악과 불의가 어디에 존재하든 그것들을 탄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중생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나라의 의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I.5). 

- 로잔 언약: “구령사업: 영혼을 구원하여 하늘에서 복락을 누리게 하기 집중한 전통적인 전도와 선교에 대한 이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 전도와 선교의 구조적 일부라고 강조한 복음주의자들의 역사적 문서.

-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신학적 사고능력이 부족하여 그러한 이해를 위한 신학적 정당화가 불충분함. 로잔 II III 보완을 시도하였는데, 여전히 불충분한 모습을 보임 (II.2,7,8 and III.21,22).

- 하나의 중요한 천명: 우리는 때때로 교회 성숙을 희생시키며 교회 성장을 추구하여 왔고, 신앙적 양육 없이 전도에만 집착해왔다”. 이런 약점들을 지적하며, 로잔 언약은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훈련해야 하며 (I.8-9), 거짓 복음, 거짓 이념, 세속화에 대항해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I.9) 천명한다.

- 오늘 짧은 강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토론을 요점들에만 집중한다: 로잔 I II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전도와 선교 안에 내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시키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신학적 교육과 제자 훈련을 어떻게 강화시켜야 한다고 하는가? 그리고 2 (Part Two) 에서는 우리는 요점들을 신학적으로 바르고 효과적으로 정당화하고 현실화 있는가를 모색할 것이다.  

 

 

II. 로잔 II: 세계 복음화를 위한2 국제 대회 (Manila, the Philippines, 1989)

 

마닐라 선언

 

마닐라 선언은 우리는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과 의식주를 빼앗긴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뚜렷하게 시위해야 한다고 천명하는데, 그것을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든 구조적인 것이든 모든 불의와 억압을 탄핵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그러한 선포를 선지자적 증거행위라고 규정한다 (II.2).

- 참된 복음은 성도들의 변화된 삶에서 뚜렷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봉사에 참여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에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나라의 요청에 헌신해야 한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복음에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로 영접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우선이다. 그러나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자비와 능력의 역사로 시위하시기도 하셨다. 오늘 우리도 비슷하게 말과 행동을 통합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II.7-8)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그것과 걸맞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선지자적 탄핵을 요구한다” (II.7-8)

- 우리가 사회적 책임에 대해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기독교화된 사회와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복음은 피할수 없는 사회적 함축의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II.8)   

- 언명들은 모두 자체로서 맞고 훌륭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복음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기반한 전통적인 표현들이다.

- 우리의 관심과 비전이 작아서 우리의 전체에서, 개인적이건 공적인 것이건,  지역적이건 세계적이건, 모든 영역들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한다. 우리는 먼저 나라와 의를 구하라’ ( 6:33)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결의한다(II.8)   

- 언명도 자체로서는 옳은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실제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받아야 하는가, 받으면 현재 위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기쁨” ( 14:17) 실현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그저 추상적인 구호에 그치고 것이다.

             - 모든 전도는 악의 주관자들과 세력들과의 영적 전쟁을 내포한다. 전쟁에서는 영적 무기로만 승리할 있는데, 특히 기도와 더불어 말씀과 성령이 주효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갱신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을 호소한다 (II.9).

            - 마닐라 선언에 영적 전쟁 대한 언급 내지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마닐라 대회 당시 Fuller 선교대학원의 Peter Wagner & co. 영향력이 작용해서 그렇게 것으로 추정된다. “영적 전쟁 주로 무속신앙적으로 이해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이해에 대한 경계도 포함되어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전쟁 대해 필요한 설명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보다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개인의 생활이 복음과 불일치하는 것만큼 복음을 비난받게 하는 것은 없다 (II.11).

- 여기 마닐라 선언 한계를 본다: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전도의 관계가  단순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만 설명되어 있고, 국가적 또는 국제적 관계에 있어 교회가 지켜야 자세나 사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교회가 기독교적 가치들과 윤리를 상대적으로 보다 반영하는 정치가들이나 정당들보다는 그것들에 상반되는 정치를 하는 부패하고 압제적 정치가들이나 정당들을 지지하여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불의와 갈등과 고난을 증대시키는 문제 (: 나찌 시대의Deutsches Christentum 오늘의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 대한 언급이 없다.  이들의 행태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 대신 불의와 갈등과 고난이 증대되고, 그것에 실망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비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교회에 냉소적이 되며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무슨 전도를 한다는 말인가?!

- 약점은 마닐라 선언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실현을 되풀이 하여 요청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복음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여 발생한 것이다. 뒤따라 나오는 2 부의 설명을 보라.

 

 

 

III. 로잔 III: 세계 복음화를 위한 3 국제 대회 (Cape Town, South Africa, 2010)

 

The Cape Town 결의

 

- The Cape Town 결의는 교회가 세계화, 전자 혁명, 세상의 경제적/정치적 요동,  세계적 빈곤, 환경 위기 기후 변화 등의 위태로운 현실들을 직시하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제자도와 선교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해야 사항들을 아주 포괄적으로 그리고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 그것은   부분들로 되어 구성되어 있다: 1 부에서는 기독교 신앙 고백의 주요점들을 설명하되,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의 삶과 사역과 선교에 대해 그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특별히 조명한다. 그리고 2 부에서는 그들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가르침들을 자세히 개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로 하여금 오늘의 세상 속에서  성숙하고 통전적인 신앙 생활과 사역 그리고 선교를 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 교본으로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로잔 I (로잔 언약) II (마닐라 선언) 많이 개선한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가 지난 23 동안 Cape Town 결의 실천하려 노력했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여져서 한국과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일꾼의 역할을 훨씬 효과적으로 감당할 있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Cape Town 결의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구원의 통치를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교회를 자신의 일꾼이요 군대로 사용하여 어떻게 사단의 죄와 고난의 통치를 꺾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실현해 가시는지의 설명을 충분히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1 :  Cape Town신앙 고백

 

- 교회에 만연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속적이고 사기적인 영적 전쟁 일탈 행위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다 (III.12).

-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초림 우리의 구원을 이룬 은혜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에 비추어 윤리적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은혜의 역사하심으로 윤리적 변화를 이루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울에게복음에 대한 순종 은혜를 신뢰하는 것이자 은혜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의 선교적 목표는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믿음의 순종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 1:5) …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복음이 요청하는 번째 행위들이며,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은 복음 신앙이 성령 (성화의 ) 통해 가능하게 하는 생활방식이다. 이와같이 순종은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의 생생한 증거이자 열매이다. 또한 순종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시금석이 (III.18-19).

- 전도 자체는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라고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분께 인격적으로 나아오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화해되는 것이다….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 그의 교회 안에 구성원으로 내포되기, 그리고 세상에서 책임있는 봉사를 하기를 포함한다우리는 전도와 사회적-정치적 활동이 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임을 천명한다. 왜냐하면 둘다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교리들, 우리의 이웃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들의 총체에서 우리를 변화시는 것이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III. 21-22 – I.5-6 에서의 인용).

- “‘총화적 선교는 복음의 선포와 (복음의) 시위이다. 그것은 단순히 전도와 사회참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총화적 선교에서는 우리의 선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서로) 사랑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사회적 결과물들을 낳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사회참여는 전도의 효과들을 낳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무시하면, 우리는 세상을 섬기도록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우리는 세상에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총화적 선교에 관한 미가 선언 에서 인용. III.22).  

- 인용문들에 덧붙여, The Cape Town 결의 교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명들을 실행하라고 요구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세례 받고, 제자도의 순종을 하도록 하기

                 -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하기, 그리고  정의와 평화 실현을 위해 매진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과 능력을 시위하기 (III.22)

- 앞의 인용문들과 덧붙인 실천 사항들 전도와 사회적 활동의 통합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강조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로잔 I (로잔 언약) II (마닐라 선언)에서와 같이 곳에서도 그들의 통합을 위한 신학적 근거 제시가 부족하여 때때로 논리전개가 어색하기도 하다. 그것은 문서들이 모두 그들의 통합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복음 ( 1:3-4; 10:9-10; 15:12; 고전 15:23-27; 1:13-14) 대한 올바른 이해에 근거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2 : 실천 사항들

 

- 삶의 여러 영역들에서 실천해야 사항들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들.

-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평생 동안 제자도를 실천하도록,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그리고 일상 생활의 어떤 장이나 환경 어디서나 선교적 효과를 내며 살고, 생각하고, 일하고, 말하도록, 훈련하기” (III.25)

- 사회적 가치들의 형성과 공적 토론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공공의 장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하기” (III.27)

-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인종 박해, 불의 또는 억압에 참여하고, 그런 죄악들을 보고 침묵하거나 무관심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그런 자세들에 대해 엉터리 신학적 정당화를 하기도 대해 회개하기  (III.29).

- 복음이 (삶의 구체적) 정황에 깊이 뿌리내려 곳의 근저에 존재하는 (비기독교적) 세계관들이나 불의의 체제들에 도전하고 변화시키지  못하면, 사악한 시대가 닥칠 ,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독교적 신앙고백을 헌신짝 처럼 저버리고 회심 전의 신념과 행동에로 회귀하기 일쑤다. 제자훈련 없는 복음화, 또는 그리스도의 명령들에 온전한 순종 없는 부흥은 단순히 부족한 것들이 아니라 위험한 것들이다” (III.29)

           나찌 시대의  Deutsches Christentum; 오늘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

 

 

 

 

2 : 바르고 포괄적이며 효과적인 전도와 선교를 위해

 

 전도와 사회적 행동을 통합하려는 로잔 운동은 지난 40 년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신학적 근거 제시가 부족하여 설득력이 떨어지고 때때로 어색한 논리전개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근본 원인들: (1) 복음에 대한 부족한 이해: 그것을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구원론적 관점에서만  해석하여, 칭의가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제사 (고전 15:3-5; 4:25; 3:21-25) 나타난 은혜를 믿음으로 덕입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그것의 관계적 의미를 무시함; (2) 그리스도의 구원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최종적 칭의를 받아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으로만 이해함; (3) 그리스도의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고 그의 교회의 믿음의 순종 통하여 지금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현재 단계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함.

 

 복음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1:3-4 15:12 수미상관으로 제시하는 대로, 보다 근본적으로 신중심적­­-기독론적 틀로 이해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정의한 하나님의 복음” ( 1:1)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어 자신의 아들을 다윗의 아들로 성육신하게 하시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사로 넘겨주시고, 그를 부활시키시어 자신의 우편에 높이심으로써 자신의 주권/통치권을 상속받아 대행하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 ( 1:3-4; 2:6-11 참조)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열방이, 인류가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구원을 얻게 하셨다 ( 15:12)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위한 구원을 이루셨다는  복된 소식인데, 안에는 복음을 받아들여 ( 믿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고 ( 하나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 (“믿음의 순종”, 1:5) 나라의 충만한 , 영생을 얻으라’ ( 1:13-14) 부름 또는 초대 함축되어 있다. 복음을 이렇게 이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적 복음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연속성을 이해하게 되며, 사도적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예수의 부활 관점에서 새롭게 표현한 것임을 있다.

 

바울은 복음을 믿어 얻는 구원을 주로 칭의 그림언어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전통적으로 그래 왔듯이 단순히 죄사함 또는 의인이라 인정함이라는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었다는 말은 이제껏 받아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벗어나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 통치를 하나님의 (성령) 힘으로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근본적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을 의미한다 ( 1:13-14).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 용서의 선물과 함께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 믿음의 순종 해야 하는 의무를 내포한다 ( 1:5; 15:18; 16:26).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는 단계들이 있다: (1)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사단의 권세를 결정적으로 깨뜨리고 우리의 구원을 이미이루셨다 (과거);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속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의 주로서, 위에서 성령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 능력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여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죄와 죽음/고난을 퍼뜨리는 사단의 세력을 소탕해가시며 (고전 15:23-28) 우리를 보호하실 아니라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와 행복” ( 하나님 나라의 샬롬; 14:17) 실현해가신다 (현재); (3)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완전히 멸하시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완전히 실현하시며 인류와 피조 세계의 구원을 완성할 것이다 (미래).

 

  전통적으로 신학은 단계들 단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과, 마지막 단계,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구원의 현재 단계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전도를 위해서는 교회의 전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현재 단계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시어 만유의 주로 세움 받았다는 복음을 마음 깊이에서 믿고, 입으로 예수가 주이시다 고백함으로써, 사단을 주로 모시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를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또는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할 것을 서약함으로써, 사단의 통치를 받아 지은 죄들을 사면 받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 하나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받는다 ( 1:9-10). 이것이 우리의 구원 또는 칭의의 첫열매인데,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현재 단계에 진입한다.

 

 이렇게 칭의된” ( 사면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 속에 계속 있어야하며 사단의 나라 속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전 10:12; 5:2; 10:20). 말은 이제 일상의 실존에서 세례 때의 신앙고백/서약을 실재화하며 살고 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cf. St. George Episcopalian Church in La Canada 벽에 걸린 “Baptismal Vows” banner). , 우리의 삶에서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을 해야 때마다 우리는 이웃을 속이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를 저지르며 우리의 이익을 도모하는 길을 택하라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사단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웃에게 진실하고, 사랑하고 의를 행하는 길을 택하라고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상 사단의 나라의 백성  또는 종으로서 불의와 갈등과 고난을 증대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일꾼, 군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정의와 평화와 (만인의)행복” (하나님 나라의 샬롬; 14:17) 실현하고 증대해 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와 (만인의) 행복 현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구원의 길임을 믿고 그것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실현되는 것들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 그리고 우리의 믿음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열매들 것이다 (“성령의 열매” = “의의 열매,   5:22-24; 1:10; 4:8 참조) (구원의 현재 단계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그것의 실재화의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구원 무엇인가, 123-142 참조; 포괄적인 토론과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책들 칭의와 하나님 나라; 칭의와 성화  참조).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힘 (1:16) 으로서, 그것을 바르게 선포하고 바르게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우리의 현재적 삶의 여러 영역들, 개인 윤리적 영역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의 영역들에서까지 실재가 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을 예시하기 위해 필자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 (109-111) 에서 몇마디 인용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1:3-4 15:12의 수미상관의 틀 안에서 전개함으로써,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은혜)을 믿음으로 덕입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게 하심 (즉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전되어,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게 하심)이라는 기쁜 소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승천의 사건 (축약하여 그리스도 사건”, 1:3-4)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인 온 인류를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하여 자신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회복하는 구원의 사건이었고, 그것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복음” (1:1)을 믿는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그 구원을 덕입어 의인이라 칭함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1:16-17).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들 중 하나가 바울이 칭의의 복음을 설명할 때마다 그 복음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구원을 은혜로만그리고 믿음으로만덕입는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모든 인간들이 어떤 차별도 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1:16; 3:22-24; 28-30; 10:12-13; 살후 1:10; 3:26, 28).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인들”,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이 세상의 불의와 갈등과 불행을 초래하는 온갖 차별들이 다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차별도 부인하고 (1:16), 헬라인들 (문명인들)야만인들의 차별도 부인하며 (1:14), 더하여 남녀 차별도 부인하고 사회신분적 차별 (종과 자유인)도 부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3:28; 고전 7:17-24; 12:13; 3:11).

복음 안에 내포된 이 만인 평등 사상은 단순히 바울로 하여금 유대교의 선민 사상을 깨고 열방에 대한 선교를 가능하게 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온 인류를 구원하는 종교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있어 남편에 대한 아내 굴종의 문화를 타파하고 (고전 7:1-16), 노예 해방의 길을 열었으며 (고전 7:21-24; 빌레몬), 인종 차별 해소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특히 바울의 칭의론으로 선포된 복음은 이런 차별들이 야기하는 불의와 억압과 착취와 갈등을 해소하고 자유와 정의와 화평과 행복을 가져오는 혁명적 힘을 가진 것입니다. 후대 교회는 때로는 이 복음을 왜곡하여 이런 해방의 복음을 도리어 차별과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데 오용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점진적으로 복음의 이 해방/구원의 힘이 발현되게 하여 기독교 문명으로 하여금 여성 해방, 노예 해방, 만인 평등원칙에 근거한 민주주의 제도 발전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사단의 통치를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 통치를 받는 , 주권의 전이를 핵심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영혼이 누릴 안식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와 그것의 열매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실체인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행복 등을 실현할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회심” (주권의 전이) 시키고, 회심자들로 하여금  하나님/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일꾼 (agent) 또는 전사들이 되게 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실체를 확대해 가게 함으로 이루어진다. 복음 선포 (전도) 복음의 힘과 기능이 실제로 발현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요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 6:11-23; 6:10-20; 요한 계시록). 이와 같이 진정한 복음 선포 자체 내에 회심자들로 하여금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행복 등의 실현에  헌신 하라는 요구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구를 담지 않은 전도는 진정한 복음 선포라고 없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만인의) 행복을 실현하려 또는 증진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며 우리의 세례 때의 서약을 배반하고 회심” (주권의 전이) 헛되게 하는 것이다.

 

 전통 신학은 복음이 제공하는 구원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단계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여, 회심 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아가며 그것을 실재화해가는 과정으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단순히 회심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의 성화 단계 또는  기독교 윤리실천의 단계로만 이해해왔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적 삶을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자신들의 현재에서의 존재 방식을  종말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얻을 구원의 완성과만 연결하여 보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더러 그것을 사회윤리 차원에서도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그들도 사회 윤리적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 구원의 현재적 실현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 1:15;   1:1-7) 받아들여/믿어 사단의 나라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에로 들어 ( 회심) 사람들은 현재에서 하나님/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통치 (구체적으로 2 사랑 계명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의 지키라는 명령) 순종하여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실체인 자유, 정의, 평화, (만인의) 행복이 증대되게 하여 자신들도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첫열매의 형태로나마 누리고 이웃 또는 세상도 누리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5-7 [산상수훈]; 13:31-33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 12:28-34/ 12:1-2; 13:8-10 [이중 사랑 계명]; 28:18-20 [ 위임]; 고전 9:21 &  6:2 [하나님/그리스도의 ]).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모든 민족들, 인류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고 세상에 구원이 실현되게 하는 일꾼과 전사가 되게 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다.

 

 

결론

 

그러므로 한국과 세계의 교회가 지금까지의 로잔 운동을 넘어 효과적인 세계 복음화를  도모하려면   

 

             (1)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하나님 나라 복음 바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리하여 전도에 있어 주된 관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로 영접하게 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도 중시해야 한다(II.7-8의 문형 참조) 라는 식의 인식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로 영접하는 것 (회심)은 우리가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실현해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요 전사로 징집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단의 죄악과 고난의 통치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만인의) 행복의 실현을 위해 적극 투쟁할 의무를 내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  진정한 제자훈련: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이와같이 제대로 이해하고 믿도록 가르치고,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통치에 철저히 믿음의 순종 하여 위에 기술한대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실재화의 일꾼이요 전사로서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훈련해야 한다.

 

오늘 미국과 한국의 다수 크리스챤들, 특히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들” ( 복음을 바르게 믿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겠다는 이들)이라 지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들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전사 노릇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단의 나라의 일꾼/전사 노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특히  각종 선거들에서, Hitler 시대의 Deutsches Christentum 참혹한 과오를 반면거울 삼아, 경쟁하는 정당들과 후보들의 정강정책, 인품, 능력등을 살펴 어느 , 어느 후보가 사단의 나라의 가치들을 반영하고, 어느 , 어느 후보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증진하려 하는가를 면밀히 살펴, 후자들을 지원하여 한다. 그리하여 정치를 통해 사단의 나라의 불의와 갈등과 고난이 증진 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 (하나님 나라의 샬롬) 땅에 크게 실현되게 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live/qpMFI2M0vyI?si=Swg9jk98lhuoCesZ

 

* 기윤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