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운동

로잔너머 2차 심포지움 (백소영)

희년선교회 2023. 11. 29. 22:36

 

로잔너머 2차 심포지움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넘어야 하나, 한 여성 신학·윤리학자의 제언

 

 

백소영

(강남대학교 기독교학 교수/한국여성신학학회 회장)

 

 

 

들어가는 말

 

내년(2024) 한국에서 열리는 로잔대회 제4차 모임을 준비하면서, 로잔이 앞으로 나아갈뿐만 아니라 넘어야 하는과제들을 곱씹어보는 <로잔 너머> 포럼에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이 자리에 적합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진영에서 범주화하는 기준으로 말하자면 저는 복음주의 진영의 딸이 아니거든요. 감리교 목회자의 자녀로 성장하면서 꽤 진보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학부와 석사 과정 6년을 몸담았던 이화여대에서는 진보를 넘어 급진적인 신학을 배웠죠. 그런데 여기 이렇게 초청되어 있네요. 우여곡절 사연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자리에 선 이상 작게라도 제 몫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만 무거울 뿐, 역량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로잔을 잘 모르거든요. WCC의 경우는 주변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이 많아서 어깨 너머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고 선언문 내용을 때마다 읽게 되기도 했죠. 학교 수업 시간에도 종종 교수님들이 소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우는 동안도 가르치는 동안도 제 학문 영역 안에서 로잔 운동과 관련된 선언문을 읽거나 토론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로잔 정신으로 무장된 동료들도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한국로잔연구교수회>도 있고 이에 속한 여성 연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텐데, 여러모로 제가 부적격인 것만 같습니다.

하여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배우는 자세로 로잔 연구에 매진했던 몇몇 연구자들의 논문들을 먼저 읽었습니다. 기초지식도 부족한 주제에 시간도 없어서 그간의 모든 로잔 발행물들을 1차 자료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만, 연구자들의 평가와 시각을 이해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그간 로잔 운동의 진행 과정과 주요 선언문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동의가 되는 부분은 명기하였지만, 이 글이 깊은 연구를 통한 학술논문이 아니고 학자 간 쟁점을 첨예하게 다루는 목적이 아니기에, 주로 논문에서 인용된 로잔대회 핵심 텍스트들을 참고하기 위한 자료로 삼았습니다. ‘이미분명한 관점(perspective)을 가지고 있는 중견(중년?) 신학·윤리학자로서 저는 /젠더 평등성이라는 핵심어를 가지고 읽고 성찰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로잔이 말하는 총체적 복음이 정말 총체적이기 위하여, 4차 대회 준비모임이나 소모임에서 꼭 다루어졌으면 좋을 것들을 몇 가지 제안할까 합니다.

 

2. 로잔 운동의 우선성과 여성의 전문성

 

우선 로잔과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한글 논문을 검색해보니 로잔 운동이 바라본 2021년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무슬림 여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하나 나오더군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후 심각하게 제기되는 여성 인권에 대한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글이었습니다. 여학생들의 교육권을 박탈하고 여성부를 폐쇄하고 직장 내 불이익을 자행하는 역행적 정부에 시위로 저항한 아프간 여성들과 연대하며 국제로잔위원회도 글로벌 Zoom 모임으로 상황을 공유하고 기도회를 가졌다고요. 이 논문의 III부가 로잔 운동의 여성관이어서 정보 습득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만 구약성서의 가부장적 여성관을 가리고, 전제부터 꾸란의 알라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성차별/성평등으로 대비시키는 것이 불편했던 걸 보니, 저는 방법론이나 시각 면에서 에큐메니컬의 딸가깝구나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을 통해 로잔 언약의 신학적 기초 위에 만들어진 3차 대회 선언문 <케이프타운 서약 신앙고백과 행동> 조항 중에서 여성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받아서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좀 길지만, 이 부분을 분석할 것이기에 인용해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고, 그들에게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에게 반역을 도모한 남녀를 통해 죄가 인류의 삶과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남자와 여자에게 꼭같이 구원과 용납과 연합을 주셨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와 아들과 딸들에게 똑같이 예언의 영을 부어주셨다. 따라서 여자와 남자는 창조와 죄, 구원과 영적으로 동등하다.(92) 남자와 여자, 기혼자와 미혼자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로서 다른 이들의 유익과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은사들을 사용할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르신 교회를 섬기기 위해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93)

 

A)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역을 멸시함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94)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부르심의 소명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은사를 책임 있게 사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다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로잔의 역사적 위치를 확증한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지며 복음와를 위한 그들의 동반자적 협력은 공동의 선을 위해 기쁘게 수납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95) 우리는 성경 시대부터 현재까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사역을 통해 세계 선교에 기여한 여성들의 놀라운 희생적 공헌을 기꺼이 인정한다.

 

B) 우리는 성경에 신실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이한 견해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여성은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여성의 영적 동등성과 초대교회에서의 교화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의 예언의 은사, 여성의 가정으로 신자들을 초대하는 것을 여성의 리더십이 발휘된 것으로 이해해 이와 같은 영적 은사들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사역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96) 우리는 이러한 노의들과 관련해 다음의 접근과 태도를 요청한다. 1.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분열과 파괴적인 언사, 혹은 서로에 대한 불경건한 적대감의 근거들을 없애기 위해 논쟁점들과 관련해 정죄함 없이 서로를 수용한다.(97) 2. 원 저자들과 현대의 독자들의 문화와 상황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함께 성경을 연구한다.(261/262) 3. 고통이 있는 곳에서는 긍휼을 보여주고, 불의와 온전함이 결핍된 곳에서는 그것에 굳세게 맞서며, 어떤 형제나 자매 안에 나타난 성령의 분명한 역사를 거부하는 곳에서는 회개가 있어야 함을 인정한다. 4. 이 세상의 권력과 지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섬기는 자세를 반영하는 남녀의 사역에 헌신한다.

 

C) 우리는, 바울이 교회에 권고했듯이 선한 것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인 경건한 여성들을 인정하고, 여성들이 교육, 봉사, 리더십, 특히 복음의 불의한 문화적 전통에 도전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회의 문을 전적으로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98) 우리는 여성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활용하거나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을 열망한다.

 

인용된 본문만 읽으면 남자와 여자는 창조, ,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같은 존재론적 동등함을 가지며 영적인 능력도 차별이 없습니다. 한때(때론 바울을 포함하여) 남자만이 하나님의 형상인 듯 해석했던 가부장적인 논지를 넘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입니다. 더구나 성경 시대부터 현재까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사역을 통해 세계 선교에 기여한 여성들의 놀라운 희생적 공헌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내용에는 설레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존재론적 평등성이 기능적으로도 평등성과 다양성을 담보하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이 선언에 진심으로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여성 안수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 선교사의 사역 현장에서 전형적으로 말씀 선포를 담당하는 남편과 내조를 담당하는 아내의 성역할 분담도 넘어야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여 이 논문의 저자 소윤정도 <케이프타운 서약>에 근거하여 여성 안수를 촉구하고 더불어 여성 사역의 전문성을 주체화하고 다양화할 것을 제안합니다.

 

부부 선교사의 경우에도 아내 선교사의 독립적 영역이 인정되기보다 남편 선교사의 보조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살림을 하는 주부로서의 내조자가 선교지에서 평가절하 되는 경우도 없어야 하겠지만 이슬람권 선교지에서 주변 무슬림 가족들과 우정 관계를 맺게 되는 연결고리로서 여성 선교사의 역할은 사실상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슬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사역에 있어서 여성 선교사는 독립적 영적 권위가 담보되어야만 하며 무슬림 여성의 신앙교육을 전담할 수 있을 만한 신학교육도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현재 아프간 무슬림 여성의 복음화를 위하여서는 훈련된 여성선교사가 필요하다. 현장의 요구로 적절하다.

 

그런데, 소위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대전제에 익숙하지 않은(실은 복음이 무엇인가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의 시선에서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땅의 여성은 목회자로 부름받거나 선교사가 되는 사람들 뿐인가요? 이는 결코 한 연구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닙니다. 사실 소 교수는 로잔 선언문에 근거하되 로잔의 함의보다 훨씬 더 넘어서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케이프타운 선언문에 포함된 여성관 자체가 총체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다고 봅니다. 물론 로잔 운동의 핵심적 지향점이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그리고 상당 부분 그것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전도로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여성이 부름받은 소명의 부분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나아가기위해 필수적으로 넘어가야하는 과제는 짚고 가야지요. 로잔 운동이 근본적으로 의지하는 창세기의 창조 명령(만물을 다스림, 창세기 128)과 예수의 지상명령(제자를 삼음, 마태복음 2818~20)의 실천적 해석과 적용에서 여성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윤정은 로잔의 우선적 명령 안에서 선교 현장에서의 여성 사역의 전문성을 확장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복음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창조물로서의 정체성 회복이 가능하다. 이를 위하여 로잔운동이 강조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협력사역이 필요한데, 여성 사역의 전문화와 전략수립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여성선교사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효과적인 사역이 진행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제도적인 장애물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부부사역자에게 있어서 여성선교사의 전문영역을 개발하고 지원하는 일, 싱글 여성사역자에게 있어서는 사역의 독립권을 보장하고 영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선교 현장은 과연 미전도 종족의 공간뿐일까요? 이미 로잔도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들에 책임 있게 대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 평신도의 리더십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닌 다음에 남은여성의 소명은 모두 가정 사역이어야 하는 건지요? 선언문이 문서화될 때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실천적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때문에, 여성의 전문성과 관련하여 보다 총체적인 언급이 필요합니다.

물론 평신도 전문성에 기반하여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은 로잔 대회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표면화되었습니다. 2, 3차 대회를 거치면서 전문인 선교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베를린 대회 의장이었던 빌리 그래함의 개회 연설에도 명시되듯이, 이는 복음 전도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선교 사역을 감당하도록 조직하는 것이고, 이때 평신도들이 가지는 전문성은 직업 전문성일 뿐, 그들의 선교 사역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전문성은 전문적인 선교사역자들이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직업인 선교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죠. 이는 2차 대회의 결과 자료인 <마닐라 선언>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평신도 전도를 위한 또 하나의 상황은 일터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일터에서 보내기 때문이며, 또한 직업이란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술의 언어, 일관성 있는 근면, 정직, 신중성, 일터에서의 정의에 관한 관심 및 특히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의 내용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된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최근의 정황으로 볼 때, 이를 직업 현장에서 적용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선언 자체는 직장 내 여성의 배치나 역할이 얼마나 성경적인지, 직장 내 관계 질서를 정의롭게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제를 가립니다. 오히려 보수적 성경관과 직업 전문성을 가진 여성 평신도가 시스템에 관한 질문 없이 자신의 일터와 가정에서 선교적 자세로 임할 때 어떤 방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열심일지 우려되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그 열심이 과연 복음에 부합하는지는 의심이 듭니다.

 

3. 로잔 운동의 사회적 책임이해를 넓히기 위한 초청, 다르게 읽는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저는 이번 4<로잔대회>에서 그동안 로잔 운동의 성경관이 막연하게 여성과 남성의 영적 동등함만 주장했던 것을 동어반복 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존재 방식과 역할에 대한 주제들을 명료히 하고 성경적인 성찰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구체적인 선언들이 문서화되기를 제안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까닭에 진실하고 권위가 있으며 오류가 없고, 신앙과 생활의 무위한 유일한 규칙이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서 여전히 말씀하시고, 어느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깨우쳐 그의 구원과 목적을 이루신다.”

 

아름답고 은혜로운선언은 근본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성서무오나 축자영감과 무엇이 다른지요? 이런 읽기 방식이라면 여성, 젠더 이슈 논의의 출발이 가능하기는 한가요? 물론 이러한 선언은 종교개혁 전통을 따라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답하겠지만, 성경을 붙드는 방식에 대한 논의나 논쟁, 고민이 없지 않나요? <시카고 선언>(1978)성경의 신적 권위와 완전축자영감으로 말미암은 무위성과 무오성을 강조했죠. 1989 미국복음주의협의화(NAE)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의 후원 아래 전세계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의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 모여 작성한 <복음주의 선언>(1989)에서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절대 무오한 규칙일 뿐 아니라 역사와 자연계에 대해서도 진리의 원천임을 주장하고, 성경은 성경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언어화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해석되는 현장의 전제(taken-for-grated, 당연히 여겨지는 것)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온 교회(Whole Church)가 온 세상(Whole World)에 전한다.”는 로잔 운동의 슬로건도 그러합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그 선언이 끄덕여지는 현장이 가부장제 사회라면 만인1, 2, 3계급을 포괄하되 오직 남자만을 포함하는 뜻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되지만, 꽤 오랫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과 유색인종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음도 압니다. 따라서 로잔대회의 선언문이 남녀의 영적 평등성과 소명의 상호협력을 말했다고 하여 이것이 정말 당대의 사회 제도적 제약을 뛰어넘어 성경적으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지점에서 로잔 운동의 DNA1세계, 남성, 보수/근본주의적 신학 성향을 주류로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 안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는 상당히 방어적이었습니다. 1962년 소집된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상당히 에큐메니컬한 기조로 흘러갔고, 1968WCC 웁살라 총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로 선언하면서 기존의 전도 중심의 선교방식에 대한 신학적 도전을 했기 때문이죠. 로잔의 언어들은 사회복음 운동, 독일 정치신학, 남미 해방신학 등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습니다. ‘전도의 우선성(primacy of evangelism)’은 이런 분위기에서 강조되었죠. 물론 휘튼 선언(1966. 4)의 초안을 미리 보았던 비서구권 교회 대표들의 반발과 제안을 반영하여 사회적 책임에 대한 조항을 첨부하였지만, 이 부분 이 어떻게 이해되는가는 1세계와 3세계의 경험에 따라 달라집니다. 적용은 말할 것도 없고요. 더구나 휘튼 선언이 가진 사회적 성향에 위기감을 가진 대응 모임이었던 베를린 세계 복음 전도대회(1966. 10)의 주도적 지도자들이 1세계 출신이라는 점, 그들이 복음 전도의 우선성과 더불어 가톨릭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해를 반박하고, 에큐메니컬 선교의 인간화에도 동의하지 않음을 천명한 지점을 연결할 때, 서구 교회 지도자들이 1차 로잔대회에서 (마지 못해) 받아들인 사회적 책임의 촉구가 얼마나 적절한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를 여성관에 적용한다면 더 열악해집니다. 1세계와 3세계의 관점과 경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자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대하게 하는 시선은 가부장제안에서 동일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명한 전례가 있지요. 1960년대 후반에 흑인인권운동과 연대하여 모든 종류의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초기의 여권운동가들은 여성 문제를 다루는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의 동일성에 놀랐습니다. 물론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로잔 2(1989. 7) 대회에는 피식민 경험이 있는 장소성을 반영하듯,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반대되는 악의 목록이 구체화되었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는, 그의 나라에 용납될 수 없는 일에 대해 예언자적인 지적을 하도록 요청한다. 우리가 개탄하는 악은, 제도화된 폭력, 정치적 부패, 사람과 땅에 대한 온갖 형태의 착취, 가정 파괴, 낙태, 마약 유통, 인권 유린과 같은 파괴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제3세계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이 부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사실을 마음 아파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가정파괴, 낙태. 여성이 관련된 문제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시각과 방법론은 결여되어 있지만, 그래도 선교의 영역으로 명시되고 언어화되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효성을 가지고 실천될 수 있었을까 질문하다가 박보경의 글에서 <마닐라 선언문>의 언어들이 구체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읽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후 로잔운동은 주후 2000년과 그 이후의 도전 운동(AD 2000 and Beyond Movement)’이나 영적 전쟁 네트워크(Spirtual Warfare Network)’의 결성 등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훨씬 더 보수적으로 선회하였다.”고요. “‘주후 2000년과 그 이후의 도전운동은 10/40창에 집중되어 있는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을 향한 복음전도의 사역을 2000년까지 펼칠 것을 제안하고 세계복음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단체들이죠.

충분히 예상가능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한번 합의되고 명시화된 것은 다음 단계의 근거가 됩니다. 박보경에 따르면 2004<파타야 대회>에서 처음으로 구조악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그 악의 구조 속에서 가해자의 편에 선 자와 피해자의 편에 선 자 사이에 화해가 긴급함을 촉구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진행하면서 가장 도전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설문 조사를 통해서 답을 도출하고 총 31개의 주제를 선정하여 토론하는 과정이 진행되었지요. 그중 22번째 이슈가 화해였습니다. 이때 논의된 화해 이슈들은 이후 그룹 토의를 넘어서 로잔 진영 내 첫 번째 화해에 관한 공식적 선언문의 결실을 보게 되었죠. “화해의 실천을 위한 우리의 헌신내용을 보면, ‘개인적인 삶에서는 치유를 추구하고, 용서와 고백을 실천하며,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서로 연대하고, 도움을 주며, 파괴적 분열과 갈등에 탄식할 것, 희망의 표징들을 찾아 축하할 것, 발전적 관계와 파트너십을 위한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초대할 것,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 정의와 화해를 옹호하고, 교회와 시민사회 정치지도자들에게도 정의와 화해를 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박보경은 이 선언문이 그동안 하나님과 인간 간의 수직적인 화해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수평적 화해를 위한 공식적인 선언문이라는 점에 의의를 둡니다.

무엇보다 이 대회에서는 서로 긴급한 행동강령을 추리면서 7번째로 화해의 응급성을 선포했죠. 그동안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말하면서 복음이 전달되는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이 어떤 배치에 있으며 복음 전달자가 온 나라, 계층이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었던 것에 비한다면, 놀라운 전진입니다. 이 계기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조차도 인종간, 민족간, 부족간의 화해가 절실히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3차 대회에 매우 주요한 의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3차 대회 서약인 케이프타운 서약문에는 종족 갈등 속 평화, 가난과 억압 속 평화, 장애인들에게 평화, 에이즈 환자들에게 평화, 고통받는 피조물 속 평화라는 5개 영역이 설정되기에 이르렀죠. 특히 가난과 억압 속 평화의 세부 사항으로 인신매매, 성매매를 위한 아동 노예화, 강제노동, 군징집을 통한 아동 학대를 비판하고 화해를 실천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결성하였습니다. ’총체적 선교 네트워크‘ ’화해 네트워크‘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 네크워크‘ ’정직과 부패방지 네트워크‘ ’자유와 정의 네트워크‘ ’장애인 네트워크‘ ’창조세계의 돌봄 네트워크가 그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그 모든 화해의 범주 안에 남자와 여자의 화해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언제나 사랑의 대상이고 상호보조적 협력의 대상이라는 신학적 전제가 현실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인종 간 갈등과 보복의 행위로 모녀를 잡아다 강제로 윤간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며 친족에 의한 명예살인이 진행되며, 그만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생애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부 여자들은 남자보다 부자이지만,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성별을 분류하면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습니다. 인류의 반이 매일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불평등과 폭력과 가난의 현실인데, 이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젠더 갈등이 첨예한 한국 땅에서 제4차 대회가 열리는 것은 의의와 과제를 함께 부여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복음 전도 과제는 그 좋은 소식을 모든 나라들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교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곧 죄와 고통과 불의와 창조 질서의 왜곡으로 가득한 세상이며, 이런 세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신해 사랑하고 섬기도록 우리를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선교에서 복음 전도와 세상에서의 헌신적인 참여가 통합되어야 하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성경 전체의 계시가 명령하고 주도하는 일이다.

 

그 좋은 소식이 이 땅의 여성들의 삶에도 총체적이고 통전적으로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도록, 이를 가로막는 장벽들이 먼저 언급되고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를 의논해야 하지 않을까요?

 

4. 생명 성장의 법칙, 고인 물이 되지 않기

 

4차 로잔대회가 열리는 2024년은 로잔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하나인 빌리 그래함과 연관하여 두 사건이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첫 번째 사건은 1974<엑스폴로 74 대회>이죠. “예수 혁명” “성령 폭발을 주제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로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표어 아래 수많은 한국 복음주의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73년에는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었죠. 5일간 112만 명이 집결했던 어마어마하게 큰 대회였습니다. 이 두 운동이 직접적으로 로잔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빌리 그래함이 당시 로잔 운동의 핵심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의 메시지와 파급력은 같은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간 순서로 보면 여의도 부흥 성회가 있었고 로잔 1차 대회가 7월에, 그리고 엑스폴로 748월이죠. 그야말로 불길 같이 번져나갔습니다. 이래저래 내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로잔대회에 기대가 클 듯합니다.

하지만, ‘**주년과 같은 기념에 열을 올리기 전에, 우리가 꼭 주목했으면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동질성의 집단안에서는 기껏 바깥의 목소리를 수용해서 선언문을 만들어도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깥의 사유, 시선, 언어, 실천을 가져오지 않는 모임은 좌든 우든 보수화됩니다. 채수일 전 한신대 총장은 부산 대회 이후의 소회를 밝히는 글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나는 WCC가 어쩌면 캔버라 총회 이후 이미 보수적으로 변했고, 더 이상 새로운 신학적 담론이나 예언자적 목소리를 WCC로부터 들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WCC가 더 이상 신학과 증언의 중심부는커녕 코디네이터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신학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주제의 문서들이 준비되고 토론되었지만, 귀기울일 만한 새로운 내용도 없고, 북미주와 유럽중심주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로잔일까요. 3세계 교회 대표들이 투쟁적으로 선언하여 기껏 로잔 언약에 포함된 사회적 책임총체적 복음의 내용이 실효성은커녕 아예 오독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7<뉴스앤조이>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 안에 김준곤 박사가 구원의 총체성을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 인용이 되어 있더군요.

 

사회 해방이, 사회 구원이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목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구원력은 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복음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세계의 전 교파를 대표하여 4000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몇 년 전에 로잔느에서 모였습니다. 그 때 로잔느 커버넌트라고 선언한 것이 있는데 거기서 보면 전도에 대해, 특별히 사회구원과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 행동이 전도는 아니며, 또 인간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절대로 정치 해방이 인간 구원이 될 수 없다.’ 굉장히 간략하고 선명하게 전도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줄로 압니다.

 

이것은 생명의 필연 법칙입니다. 긴 토론과 부딪힘 속에서 겨우 합의된 복음의 총체성이 이렇게 다시 분열됩니다. 고인 물이니까요.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힘을 나누고 해석권을 가지니까요.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흐르려면 새 물을 받아야지요. 최근 로잔 운동 안에서도 신학연구위원회(Theology Working Group)의 구성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이 던지는 선교적 주제들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유입되는 새 물도 있겠지요. 여기에 더하여 여성(주의적) 이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김광성, “로잔 운동 선언문에 나타난 전문인 선교 개념 고찰”, 복음과 선교54(2021): 9-42.

나용화, “잔 언약과 한국교회의 과제”, 개신논집7 (2007): 121-152.

박보경, “로잔운동에 나타나는 화해로서의 선교: 2004년 파타야 포럼과 케이프타운 서약문을 중심으로”, 선교신학38 (2015): 141-170.

박영환, “베를린 세계복음전도대회가 로잔대회에 끼친 영향과 과제”, 선교신학46(2017): 108-144.

안승오, “로잔신학의 흐름에 있어서 우선순위 문제”, 선교신학40 (2015): 143-170

이문식, “로잔 언약과 한국교회-언약과 선언과 서약으로”, 로잔 너머연속심포지엄 1차 로잔운동과 한국교회2023. 6.27. 자료집: 3-18.

장훈태, “로잔운동과 신학교육”, 선교신학40 (2015): 241-274.

채수일 “WCC 10차 부산총회와 향후 한국교회의 과제”, 세계와 선교217.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3 겨울호: 3-6.

 

 

* 기윤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