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운동

로잔너머 2차 심포지움 (구교형)

희년선교회 2023. 11. 29. 22:43

 

로잔너머 2차 심포지움 (2023.8.29)

국제 로잔 운동과 한국 사회선교운동

 

구교형 (성서한국 이사장)

 

들어가는 말: 로잔 운동,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19746월 스위스 로잔에서 첫 대회(세계 복음화 국제대회)를 개최함으로 시작된 국제로잔운동이 20249월 인천에서 4차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50년을 맞게 된다. 로잔대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많은 국제선교운동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로잔은 그것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지금도 50주년을 기념하고, 그 이름을 확인하는가? ‘로잔 운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옳고 그름이나 우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질문을 기억해 달라.

 

로잔 운동을 한마디로 하자면, ‘온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온 세계에(the whole world)!’에 전하자는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whole(총체적, 온전한)’이라는 형용사가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이 자꾸 반복하는 것에 그것의 특징, 그것의 정체성이 있다. 첫 질문을 받아 대답하자면, 로잔의 정체성, 로잔의 차별성, 로잔의 탁월성은 바로 ‘whole(총체적, 온전한)’에 있다는 말이다.

 

로잔 운동이 총체성을 강조하는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그 이전까지 세계교회의 복음 운동, 선교 운동은 계속 치우쳤다’, 총제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음과 선교의 총체성(총체적 복음, 총체적 선교)이 정말 필요하다면 성경적 근거부터 확인해 봐야 한다. 누구도 아닌 바로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총체적 복음과 총체적 선교였다. 신약 전체나 복음서 전체를 살펴볼 것도 없다. 예수님의 30년 생애와 사역 전체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준 마태복음 9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갈 길 잃은 양처럼 인생을 기진맥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36)

 

그러한 불쌍한 인생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복음(선교) 사역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35)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복음 선포, 양육과 훈련, 세상 구제와 섬김이 모두 주님의 복음(선교) 사역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 사실을 네 복음서 모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주님의 그 복음, 주님의 그 선교 사역을 우리의 복음, 우리의 선교적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게 총체적 복음, 총체적 선교이다. 좁은 의미의 해외선교, 직업선교사만의 활동이라면 굳이 로잔의 이름과 정신을 꺼내 들며 50년이나 기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2천 년 기독교 역사, 심지어 로잔 이후 50년조차 여전히 복음도, 선교도 총체성을 품기보다는 항상 편향성(편중성)에서 멈췄다. 로잔은 과연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인물들이 어떤 생각으로 시작한 운동인지 살피는 것으로부터 차별성을 이야기해 보자.

 

1. 20세기 세계의 위기 속에 시작한 국제 로잔운동

 

19세기~20세기 초까지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식민화, 제국주의시대로 경험되지만, 서구인들에 게는 선진화, 문명화의 시대로 기억되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대중 민주주의를 앞세워 인류 의 무한성장이 가능한 현세적 유토피아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여기에 더해 복음 화와 세계 선교도 활발하게 일어났으니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다는 낙관주의가 꽃피웠다.

 

그러나 대망의 20세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낙관주의와 무한 진보사상은 한순간에 뒤 집혔다. 바로 두 번의 처참한 세계대전의 경험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1914~18년/전사자 9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600만 명 등 1,500만 명 추산, 부상자 2,700만 명)은 인간성과 인 류문명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자책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의 기독교 신앙과 선진문명의 확산은 고사하고 같은 기독교권 국가(개신교·가톨릭·정교회)끼리 세계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끝의 참 화였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깊은 반성과 국제평화운동이 일어나는 등 대책도 뒤따랐지 만, 20여 년 만에 더 큰 규모의 두 번째 세계대전(1939~45년/사망자 공식 통계 5,646만 명~ 비공식적으로 7,300만 명 추산)이 일어난다.

 

그러나 선진문명과 기독교 신앙 전파의 명분 아래 일어난 서구의 팽창이 전 세계에 몰고 온 쓴 뿌리는 전쟁만이 아니었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식민지 곳곳 에 종족, 역사, 종교, 지역 기반 등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멋대로 나라를 자르고 붙여 분할통치 함으로써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계속되는 내전과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이러한 과정들을 지켜보며 서구 지성과 기독교계의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세계 선교 와 복음화에 깊은 반성과 고뇌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그 결과, 세계교회와 선교계도 가난, 전 쟁, 인권, 차별 등 인간화 과제와 함께 가지 않는 복음화 운동은 반쪽일 뿐 아니라 왜곡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화된 세계 상황에서 인간화 과제까지 끌어안은 포괄적 선교 운동 을 세계교회가 함께 해 나가자는 취지로 1948년 출범한 게 바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 이다.

 

그러나 WCC 운동은 출범과 더불어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선교 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모든 사건이라는 개념)의 강조와 ‘선 교 모라토리엄’(Moratorium/선교에 하나님의 주도성을 인정하여 당분간 선교사 파송을 중단 하자는 주장) 등이 이어지면서 전통적 기독교회의 큰 반발을 샀다. 특히 1930년대부터 자유주 의신학에 대응하여 별도의 움직임을 가져왔던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반발이 더 커졌다.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일어난 새로운 선교 운동이 바로 로잔 운동이다. ‘역사적 신앙고백과 선교를 존중하면서도’(전통적),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와 상황, 인간적 과제도 소홀히 하지 않 는’(시대적), 총체적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복음주의다. 바로 이들이 1974년 스위스 로잔에 모여 국제 로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 한 미 국 대중적 기독교. 존 스토트를 위시한 영국 지성적 기독교, 르네 빠띠야 등 남미 사회적 제 자도 그룹 등이 함께 만나 로잔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2. 로잔 운동의 한국수용 과정과 K(한국)형 복음주의(로잔운동)

 

한국교회는 1974년 로잔 첫 대회부터 조종남·조동진·김옥길 등 대표들을 보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여의도에서 열린 ‘엑스플로 74 대회’가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반면, 로잔대회는 유신독재가 절정이던 당시 참석자들조차 이를 자세히 소개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로잔 소식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회 참가자 중 하나인 조종남 박사와 영국 에서 공부하던 이승장 목사 등에 의해 번역·소개됨으로써 한국에도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그러다 보니 50년이 지나도록 한국에서 로잔 운동은 주류 한국교회보다 학원 선교계 및 개혁적 복음주의 운동 등 수용폭이 좁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간접적, 우회적, 사후적 수용과정이 오히려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로잔운동과 언약이 돌고 돌아 어렵사리 한국에 수용되던 1980년대 한국의 특별한 상황이 이 문서의 존재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1980년 광주학살을 배경으로 집권한 신군부 정권의 독재가 계속되면서 재야 지식인, 학생, 노동자 등 많은 이들의 희생과 저항이 잇따랐다. 반면 이러한 상황과는 아 랑곳없이 한국교회는 196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부흥하여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당연히 같은 시대를 사는 교회의 젊은이들도 시대적 아픔과 고민을 공유했다. 소위 진보기독교회는 이미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을 통해 시대 상황을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기반이 있었지만, 다 수의 보수교회 젊은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대다수 주류 보수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젊은이들의 고민을 무시하거나 잠재우려 했 고 때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믿음 없는 행동으로 꾸짖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로잔 언약이 소개된 것이다. 그 운동은 빌리 그래함을 비롯해 존 스토트 등 보수 교회도 인정하는 저명한 국제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했고, 제5항에는 버젓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모두 15개 항목 중 겨우 하나에 불과한 아주 원론적이고 진 부하기까지 한 내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에 분노와 부채감으로 성경적, 신학적 정당성에 목말라하던 젊은이들에게는 생수처럼 느껴졌다. 표현이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국제복음주의 문서에 그런 항목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로잔 언약을 직접 봤든 보지 못했든, 이 문서의 소문은 소리 없이, 그러나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시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잡지 <복음과 상황>(1991년)도 몇 번에 걸쳐 로잔 언약은 물 론 비슷한 성격의 문서들을 부록으로 연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로잔의 주역이며 걸출한 복음주의 운동가인 존 스토트를 지도자로 둔 IVF 등 대학생 선교단체와 1980년대 이후 강남 중 산층 목회에 성공한 주요 대형교회 청년부, 대학부, 그리고 자생적 모임들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회선교운동이 자연스럽게 모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해이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민주화 대 투쟁의 성과로 그토록 그리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렵사리 쟁취 한 합법적 정권 쟁취의 기회를 부정선거로 인해 빼앗기지 않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함께 처음 활동 조직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공정선거감시 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복협)다. 대선 결과 군부 출신 노태우 대통 령이 당선되었지만,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다시 ‘복음주의청년연합’(복청)을 만들어 연합활동을 모색했고, 1991년 3월 상설조직인 ‘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복청학련)을 탄생시켰 다. 이 활동에 참여했던 주요 그룹과 인물들은 남서울교회(홍정길)와 청년대학부(강경민), 사랑 의 교회(옥한흠)와 청년대학부(박성남), 구로희년교회와 희년선교회(이문식), 할렐루야교회 대학 부(이만열, 윤환철), IVF와 고직한, ESF와 이승장, 김회권과 김호열, 겨자씨형제단(박철수, 구 교형), 서울대기독학생회와 기문연(최은석, 이종철, 박정수, 김근주, 오동성, 박문재, 강문대), 외대 기사연(김기현) 등이다. 그러나 몇 년에 걸쳐 의욕적으로 활동한 이들은 역량 미숙 등 여 러 문제가 겹쳐 잡지 ‘복음과 상황’을 창간하는 것으로 서둘러 종지부를 찍게 된다. 비록 연합 적 조직운동은 중단되었지만, 상당수는 다양한 교회, 단체 등의 활동을 기반으로 그 뒤 10~30 년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특히 2000년대를 전후하여 시민운동 성격의 다양한 부문 단체가 창립되며 전성기를 맞았다. 헨리죠지협회(현 희년함께 전신/1984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경제정의실천연합(이상 1989 년), 남북나눔운동(1993년), 좋은교사(1995년), 새벽이슬(1997년), 기독법률가회(CLF/1999년) 뉴스앤조이, 공의정치포럼(이상 2000년), 교회개혁실천연대(2002년), 청어람 아카데미(2005년), 평화누리(2007년), 하나누리(2007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2010년), 평통연대(2010년), 한국복 음주의교회연합(2014년), 기독교반성폭력센터(2018년) 등 다양하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정신으로 사회 각 영역을 개혁하려는 목적의 개별운동이 활발해지자 복청 학련 이후 중단되었던 복음주의 사회선교 연합운동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났 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선각자 김교신 선생의 ‘성서 조선’을 뒤따르는 마음을 담아 ‘성서한 국’이라는 이름으로 2002년 제1회 성서한국 수련회(할렐루야교회)를 가졌고, 2003년 성서한국 포럼을 거쳐, 1988년부터 시작된 선교한국운동 형식을 채용하여 2005년 성서한국 본부를 출 범함과 동시에 제1회 성서한국대회(대전 침신대)를 시작했다.

 

이후 성서한국은 전국대회와 지역대회 개최, 사회선교현장 적극 참여, 사회선교단체 연대기반 마련에 힘써왔다. 또, 에큐메니칼 진영(KNCC, 목정평, 기사연, 예수살기, 고난함께 등)과 함께 연대하며 복음주의 이름으로 시대적 비극과 위기의 현장에 참여하는 기독교사회선교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다.

 

 

중간평가: K(한국)형 복음주의(로잔운동)

 

1974년 시작해 내년 50주년을 맞는 국제로잔운동은 더 넓은 계층의, 더 다양한 개념과 방법으로, 폭넓은 복음주의 선교운동을 제안해 왔다. 그러나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거칠게 평가 한다면, 여전히 원론적인 선언에 머무는 느낌이고, 21세기 변화된 시대의 선교과제 창출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며, 1세대 지도자 퇴장 이후 로잔 운동의 비전과 중심인물들이 보이지 않 는 것 같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 국제로잔운동의 성과가 각국과 다양한 사회에 어떻게 수용 되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앞서 살펴본 한국에서 로잔 운동의 간접적, 우회적, 사후적 수용 형태는 오히려 매우 독창적이고, 뚜렷한 특징을 가졌다고 자평할 수 있다. 한국복음주의연구소장 이강일 목 사는 이를 한국(K)형 복음주의(로잔운동)라고까지 부르는데 매우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앞서 말했듯이 로잔운동의 한국 수용과정은 대회 참석자들의 자발적 운동도, 대다 수 주류교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서 1990년대 이후 시대적 요청에 목말랐던 개인 및 소 수 집단에 의해 한국화하였을 뿐 아니라 30년 동안 다양한 과제와 영역에 꾸준히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그 실례를 제시한다. 비교적 최근인 2014년 창립한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의 정관을 보자.

 

『제2조 (목적) 본회는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복음에 바탕을 둔 신앙과 삶을 정립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위한 연합과 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신앙고백) 우리는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국제회의’에서 채택 한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의 정신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를 계승 발전시킨 1989년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o)’의 신앙적 고백(affirmations) 21개 항목을 한 마음으로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지난 2011년 작성된 ‘케이프타운 헌신(The Capetown Commitment)’의 10개조 신앙 서약과 행동을 위한 요청을 기꺼운 부담감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한국적 상황 속에서 실현할 것을 다짐한다.』

 

그 결과, 한국 복음주의에 새로운 신앙패턴을 공유한 동질집단이 생겨났다. 신인류라는 말처 럼 사회적 이슈와 사회적 약자에 진정성 있는 관심을 갖는 독특한 복음주의(독특한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 교파, 지역, 규모 다 다른데도 비슷한 신앙고백, 신앙 패턴, 정서를 갖는 동질집 단)가 한국에 탄생한 것이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없던 현상이다. 지금 한창 목청을 키우 는 정치적 보수기독교 집단도 K(한국)형 복음주의(로잔운동)가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교회 안 극우 정치설교만 있었다. 그러나 사회선교진영은 한국 복음주의 전체를 결코 대변하지 않는 복음의 총체성 가운데 한 부분임을 또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총체성 가운데 우리의 역할을 할 뿐이다.

 

 

3. 보수기독교 정치참여 운동

 

로잔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2000년 들어 새롭게 시작된 또 다른 기독교 사회참여운 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분명한 가치와 통일된 흐름을 갖춘 운동은 아니지만, 갈수록 분명한 영향력을 형성해 가고 있어 간단하게라도 언급해 보려고 한다.

 

만년 야당으로 남을 줄 알았던 민주당 김대중(1998~2003년), 노무현(2003~08년) 대통령이 연 이어 10년을 집권하고 최근에도 문재인 대통령(2017~22년)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 진보 세 력의 약진이 두드러졌지만, 이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의 시민운동적 결집 움직임도 커졌다. 먼저 2000년대 초 일부 신진 보수정치인들과 옛 기독교 진보운동세력의 결합이 일어났다. 이들은 뉴라이트전국연합(김진홍/2005년), 기독교사회책임(서경석, 고직한/2004년) 등을 결성해 조금씩 다르지만, 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공통과제에 함께 했고,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이때 서로 적지 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복음주의 사회선교운 동 후배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결별하고 성서한국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다시 십수 년이 흐르며 김진홍, 서경석 목사는 뒤로 물러났지만, 또 다른 보수 기독교사회(정 치) 운동이 어어지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1989년)의 정치운동, 한국기독당(2004년)에서 시작된 기독당 운동과 전광훈씨, 에스더구국기도운동(2007년), 그리고 전국화된 동성애 및 차 별금지법 반대 운동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이합집산하고 있다.

 

 

4. K(한국)형 복음주의(로잔운동)는 지속 가능한가?

 

로잔운동을 근거 삼아 지난 30년 이어온 한국형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은 비교적 길지 않은 역사와 경험, 열악한 인적, 물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제 몫을 감당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020년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낙관할 수 없다. 몇 가지 관점을 제 안한다.

 

첫째, 시대와 세대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변화를 읽는 우리의 대응이 따라가지 못한다.

 

①86형 복음주의 세대 -극복하려는 공동 목표가 비교적 선명했다(독재와 재벌 반대, 남북통일). -한국교회를 향한 목표와 주장도 분명했다(성속 이원적 천국관, 물신숭배, 기복신앙 극복). -따라서 86형 복음주의는 목표가 분명했던 만큼 사회적으로는 민주당 중심의 정통 야당 세력, 기독교적으로는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연대, 협력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구도로 충분했다.

 

②MZ형 복음주의 세대

-시대와 세대는 함께 변한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세대가 그대로 일수도, 세대가 변했는데 시 대 과제가 같을 수도 없다. 1950년 한국전쟁 후 30년인 1980년대에 전쟁 대신 광주학살을 기억하는 86형 청년 세대와 중산층 등장으로 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했다. 이제 1980년 광주학살 후 30년인 2010년대 이후 광주 대신 신자유주의의 혹독함에 내몰린 MZ세대가 일어났다. 그 에 따라 세대도, 과제도, 운동방식도 다 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국힘당 중심의 보수안정 세력 vs 민주당 중심의 진보개혁 연대 vs 지속가능성 미래 생존적 보편과제(비당파적 연합)’로 세분화.

 

-신앙적 이원론은 더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니다. 특히 MZ세대에게는 교리적 옳음은 현실에서 반드시 확인되어야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 이슈에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럽 고, 그걸 교회 과제로 생각한다.

 

③여자월드컵 황금세대와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미래

 

-여자 월드컵(2023년 7월 20일~8월 20일)을 앞두고 아직 활동 중인 여자축구 황금세대(2010 년 U-20 월드컵 3위, U-17 월드컵 우승)와 골때녀 신드롬을 보며 역대 최고 성적을 기대했 다. 그러나 세계 축구의 높은 벽 앞에 무기력했다(1무 2패로 조별리그 탈락). 진실은 이렇다. 등록된 여자 축구선수가 황금세대 전성기인 10년 전보다 더 줄어 2019년 통계 4,200명 밖에 안 된다(일본 390,000명, 피파 1위 미국 9,500,000명, 올해 우승 스페인 58,372명). 그래서 올해 월드컵 참가팀 중 최고령인 28.9세다(지소연 등 황금세대 모두 30대 초중반).

 

-현재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복사판이다. 86 정치인들의 기득권 세대 정치와 다른 모 델이다. -선배 세대는 자신들의 관심과 판단, 운동방식이 계속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 후배 세대는 불평보다는 좀 더 과감한 의제 설정과 시도가 필요하다.

 

-상대방 세대와 중심과제에 대한 세대적 간극이 적지 않다. 세대가 다르고, 경험(체험)이 다르 고, 성별이 다른데 어떻게 갈등이 없을까?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운동장은 같이 쓰자. 같은 운동장에서 자기 관심대로 누구는 축구하고, 또 누구는 노래 들으며 춤추고, 누구 는 달리기하고, 또 누구는 쉬며, 각자 좋아하는 걸 하다가 필요하면 전체 운동회도 하고, 또 편을 달리 짜서 다른 경기를 할 수도 있다.

 

-‘K(한국)형 복음주의(로잔운동)은 지속 가능한가?’ 선배가 답변할 몫이 있고, 후배가 대답해 야 할 부분이 있다. 각자 자신들이 답변해야 할 몫을 고심해 보자.

 

둘째, 진정성과 설득력으로 결판날 것이다.

 

-주류 기독교 운동도 칼뱅주의-문화적 사명-영역주권론(카이퍼)를 학습하여 기독교 세계관 운 동을 주장한다(물론 같은 언어에 다른 개념을 넣은 것이다). 같은 도구를 가지고 다른 농사를 짓는 것이다. 누구 세계관이 옳으냐의 문제는 결국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의 삶의 진정성과 신앙적, 사회적 설득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2024년 로잔한국대회을 바라보는 제안

 

2024년 한국에서 로잔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한국 준비위원회에서 밝힌 대로 여러 면에서 참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려면 전제가 있다.

 

첫째, 로잔 준비위원회에게 바란다.

 

1974년 시작 이후 50년이 흘러오면서 모든 대회마다 한국교회는 대표단을 파견하였지만, 한 국교회에 로잔 정신은 여전히 낯설다. 지금 대회 준비위 메시지와 활동 방식도 로잔 정신 구 현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로잔 언약의 총체적 복음 정신과 크게 상관없는 국제대회를 무난 하게 치르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과 염려는 여전히 정당하다. 잼버리처럼 되지 않도 록 좀 더 분명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동시에 대회를 준비하는 주최와 주관조직은 제한될 수 있겠지만, 국제 로잔 정신은 공공재이 므로 독점할 수 없다. 이제라도 로잔대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지만, 그 정신을 존중하는 한국 교회의 다양한 동역자들의 목소리 청취와 반영에 더욱 힘써야 한다.

 

둘째, 사회선교운동 그룹에 바란다.

 

로잔운동과 한국대회에 대한 사회선교운동 그룹의 우려는 정당하다. 그러나 엄연히 2024년 한 국에서 개최될 한국대회에 그저 무관심하거나 어떤 의견도 없다면 우리 자신의 역사와 활동 근거에 대한 망각이 될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 아쉬움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참여의 기회,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과거 로잔, 현재 로잔, 미래 로잔!

 

-우리가 50년 가까운 지금 로잔(별로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을 이야기하러 모인 것은 로잔을 통해 한국 사회, 한국교회, 사회선교운동, 곧 우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로잔 주최 측(국제 로잔, 한국 로잔)은 2024년 대회를 통해 로잔이 존속해야 할 이유를 제시 하지 못한다면 화려한 잔치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2024년 한국대회 는 ‘로잔 너머’, ‘로잔 포스트’의 자리여야 한다.

 

 

* 기윤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