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관점 (재한 아나벱티스트 센터)
<기독교 국가 이전의 관점>
회심의 네 가지 차원: 저스틴 마터, 1. 변증 14 (로마 A.D.150년)
[악령들은] 당신을 그들의 종이나 노예로 만들고자 온갖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설득되어 홀로 하나이신 독생자를 따르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일, 즉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여러가지로 붙잡고 있다.
한때 음란에 빠져 기쁨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절제로 인하여 기뻐하며, 한때 주술에 빠져 헤매던 사람들이 이제 선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신하게 되며, 부의 축적을 통해 쾌락과 기쁨을 누리던 우리들이 이제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진 재물을 공동의 기금으로 내어놓으며, 다른 관습과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함께하기 보다는 서로 미워하고 죽이기를 일삼던 우리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함께 살게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공평하신 명령들을 따라 살아가며, 함께 좋은 것들을 받기를 소원하며 함께 살며 …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철학자들의 논리와는 달리 아주 짧고 간단한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2장 말씀을 교회에 적용: 저스틴 마터, 트리포와의 대화, 110.2-3
서로 살륙하고, 사악함의 모든 종류로서의 전쟁을 기뻐하였던 우리는 세상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전쟁의 무기가 평화의 도구들로, 즉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농부의 연장이 되게 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오는 경건과 형제 사랑, 공의와 믿음, 그리고 희망을 개간해 나가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해야 함 어떤 종류의 살인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아싸나고라스, Legatio 11. 34-35 (아테네, A.D. 175년)
그러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이러한 가르침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이같이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 [이방의 철학자 중에] 누가 원수를 미워하는 대신에 사랑함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정하게 하겠으며,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축복을 해주며, 그들을 잡아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겠느냐? 반대로 우리와 함께할 너희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 상인들, 그리고 여자 노인들, 더 나아가 우리들의 가르침에서 얻은 유익을 말로조차 표현할 수 없지만 행함으로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친 이러한 말들을 다시 말할 수는 없으나, 행함으로 선한 삶을 삼는 사람들이다. 매를 맞아도, 그들은 매를 되갚지 아니하며, 도적질을 당해도 공회에 재판을 요구하지 않으며, 구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주며, 그들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죽음에 넘기우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이 죽음에 넘기우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투사들이 싸우는 광경들을 보지 않는다. 우리가 낙태로 안내되는 여인들을 살인자들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무슨 이유로 살인을 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일치를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를 위해 싸우거나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다: 오리겐, 셀숨에 반대하여 8.68
[이방인 비평가 셀수스에 대한 반대]: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같이 행동해야마 한다면, 세속적인 것들이 그렇게 야만적이되거나 그처럼 무법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동안 [황제를] 그렇게 방종하고, 외로운, 버려진 존재로 있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참여에 대한 성경적인 논쟁: 구약과 누가복음 3장 14절을 인용한 신학자와 다른 한 신도와의 논쟁: 터툴리안, De Idololatria, 19
한 신자가 그 자신이 군복무를 이행하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군대가 그의 신앙을 인정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어떤 등급으로 희생을 치르게 할 것인지, 얼마나 많은 벌금을 내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신적인 예식과 인간적인 예식의 차이, 즉 그리스도의 표준과 악령의 표준의 차이, 빛의 부대와 어둠의 부대에 대하여는 일치된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한 영혼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시저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모세가 지팡이를 사용하였고, 아론이 허리띠를 맸고, 세례요한이 가죽 띠를 맸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사람들의 선봉에 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쟁을 했다; 만약에 이러한 주제가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 그러나 어떻게 크리스천이 전쟁을 반대하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금지하신 검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위해 봉사할 것인가? 군인들이 요한에게 왔을 때 그리고 그들의 통치방식을 받아들였던 것 같이 백부장이 믿은 것 여전히 주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고 모든 군인들의 대검을 풀어버리셨다.
<기독교 공인 이후의 관점>
이사야 2장 말씀을 적용하지 않음: 어거스틴은 한번도 이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 평화란 마음 속과 하늘나라에서만 가능했다.
마음의 평화 (시편 46편 9절),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이 본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아직도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배를 위해 서로 싸우고 있다. 정당과 정당이, 유대인들끼리, 이방인들끼리, 기독교인들끼리, 이단들끼리, 아니면 이들 서로가 전쟁을 하고 있다. 어떤 싸움은 진리를 위한 것이고, 어떤 싸움은 거짓을 위한 싸움이다. 아마도 이 본문은 언젠가 성취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것이 성취되지 않을 말씀은 아닌지? 그렇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성취되었다. 알곡들이 있는 곳에서는 성취되었다. 그러나 가라지들이 있는 곳에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어거스틴 Enarr. In ps. 45.10
영원의 선상에 있는 평화
부활하신 이는 미래의 평화를 약속하셨지 이 땅위의 평화와 이생에서의 평화를 약속하신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한다. 그들은 무엇인가 좋은 것들을 갈구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에서 참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생에 평화는 없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도록 약속이 되어 있다. Augustine, Enarr. in ps. 48.17
어거스틴: 군복무에 대한 성경적 견해(구약과 누가복음 3:14)와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의견
Ep 189, 보나페이스에게 보내는 서한 (아프리카 419년):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기 위하여 실제로 군복무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주 큰 간증거리를 주었던 성스런 다윗과도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또한 많은 당대의 의로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또한 주께 나왔던 백부장 같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주여 나는 주께서 내집에 들어오실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고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병사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에게 나아 왔을 때, 주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하신 바로 그 신랑의 친구요,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요한이 군인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왔을때, 그리고 그들이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 묻었을때 그들에게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받는 봉급으로 족한줄 알라’고 하였다. 요한은 그들에게 그들이 군에 복무함으로써 받는 삯에 만족하라고 할 때, 분명히 병사로서 봉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평화는 당신들의 원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전쟁은 필요에 따라서 행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만이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보내고 평화롭게 그들을 보호하신다. 평화는 전쟁에 의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평화를 위해 치러지는 것이고 전쟁에 의해 평화가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대가를 치루는 전쟁이라할지라도, 공격하는 사람들을 정복함으로써 화평케하는 영은 소중히 여겨지며, 또 그들에게 평화의 유익을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주께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의지와 뜻이 아닌 필요에 의해 당신을 대항하여 싸우는 적을 죽이도록 하라. 폭력은 거역하고 반역하는 사람을 향하여 사용되는 것이므로, 정복당한 사람들이나 포로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규율>
사도적 전통, 16 (3세기 사히딕):
병사인 크리스천들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며, 다시 말해 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군인이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만약 그가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을 받았다해도, 그 명령을 수행해서는 안되며, 위의 권위를 두고 어떠한 맹세를 해서도 안된다. 만약 그가 이를 지키기를 꺼려한다면 그를 입교하지 못하게 하라. 칼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나 자색옷을 입고 정부를 위해 근무하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두게 하든지 입교하지 못하게 하라. 예비신자 혹은 신자로서 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입교하지 못하도록 하라.
히포리투스의 법령들, 13-14 (이집트, 336-340년):
군인들은 명령이 없이 군인이 될수 없고 사람을 죽일 수 없다. –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은 참회를 통해 속죄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행정가나 군인은 어느 누구도 죽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화관을 써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권위를 갖고 복음이 말하는 바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마다 추방되어야 하며, 감독은 이들과 함께 기도해서는 안된다.
비록 정부로부터 사람을 죽일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으로써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 그 사람이 군인이라더라도 –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한마디의 나쁜 말이라도 발설 해서는 안된다. 존경받는 사람이라도 그들 머리에 화관을 써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완전한 권위에 서거나 행정가가 되거나 복음의 의를 덧입지 않은 사람은 신자들의 무리로부터 추방되어야하며 감독은 이들과 함께 기도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은 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비록 그가 칼을 차고 있는 대장에 의해 강요를 받아도, 기독교인은 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피를 흘리는 죄를 자신에게 지워서는 안된다. 그러나 만약 그가 피를 흘리게된다면, 처벌을 받거나 참회의 눈물을 흘림에 의해 죄가 깨끗해지기 전까지 신비로운 성찬식에 참여를 해서는 안된다. 거짓된 모습으로 나와서는 안되며 대신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언약, 2.2 (소아시아, 4세기 말,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되며 군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 전에 예비신자들에게 3:14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군인이든 정부의 권위에 속한 사람이든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죽이거나, 강포하거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거나,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야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이성으로 만족스러운 편을 택하게하라.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주안에서 세례를 받고자 한다면, 군복무를 그만두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위에 속하지 않게 하라.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예비신자나 혹은 처음 믿고자 하는 사람이 군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의 의사를 꺾든지, 아니면 입교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가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떠나 있어, 그가 육적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하고 믿음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사도적 관행, 8.32.10 (시리아, 385년):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이 되는 것이 가하나, 누가복음 3장 14절의 법을 살펴보도록 해야한다.
만약 군인이 기독교에 입문을 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불의를 행치 말며,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받는 봉급으로 족한줄 알라’고 가르쳐야한다. 만약 그가 이러한 법에 순종한다면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되,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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