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복음 (Gospel)

그리스도인과 전쟁 II.

희년선교회 2021. 9. 18. 20:17

기독교와 전쟁

 

손봉호 교수 /고신대석좌교수   

2010. 12. 7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증진시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전쟁

 

1. 한반도의 상황

 

이번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한 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서해안에서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또 일어날지 걱정입니다. 더군다나 중국이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의 항공모함까지 출동되기 때문에 긴장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동안 북한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아옹산 테러, KAL가 폭파, 천안함 침몰 등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들이 많았으나 우리 영토가 북한의 의도된 포격을 당하고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6.25 전쟁 이후 처음입니다.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난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쟁이 어떤 것이며, , 북간의 긴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이번에 좀 더 절실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연평도가 포격을 당했을 때 대통령이 내린 명령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한 편으로는 도발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응하라 해 놓고는 다른 한 편으로는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 해서 군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했다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사람들이나 확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비판적입니다.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49%가 대통령의 대응이 잘못되었다고 반응하고 29.2%만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합니다.

 

물론 대통령이 져야 할 그 무거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일반 시민들은 이런, 저런 주장을 강하게 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국가의 이익,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 그런 돌발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도발 행위가 잘못된 것은 사실이고, 좀 아프게 응징해야 그런 만행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비행기가 북한 군사기지를 폭격해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이고 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감수하고라도 강력하게 복수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전쟁의 폭력성에 대해서

 

전쟁의 특성은 폭력행사입니다. 전쟁학자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는 전쟁이란 "아군의 뜻을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하여 적군을 강제로 제압하려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개인 간,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이해, 양보, 합리성, 타협 등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 간의 갈등을 물리적인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전쟁입니다. 짐승들의 해결방법과 비슷하다 하겠으나 실제로는 어떤 짐승도 사용하지 않는 가장 야만적인 해결방법입니다.

 

전쟁 중에는 평소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수행합니다. 평상시에는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도 벌을 받는데 전쟁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영웅이 됩니다. 평상시에는 이웃 집 유리창 하나만 깨어도 물어내라고 야단인제 전쟁에는 온 나라가 초토화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백선엽 장군을 만날 일이 있어서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복도에 깨알 같은 글자로 6.25 전쟁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긴 복도 양쪽 벽을 완전히 덮었습니다. 저는 자신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습니다. 저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부모에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형님, 동생, 오빠였는데 삶을 충분히 살지도 못하고 시체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전쟁은 이와 같이 사람의 고귀한 생명, 행복한 삶, 건강한 몸, 애써 모은 재산, 국민의 혈세로 건설해 놓은 기반시설 등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립니다.

 

그 뿐 아니라 전쟁 중에는 많은 사람이 이성을 잃어버리고 짐승보다 더 악해지고 더 잔인해져서 인간이 평소에 할 수 없는 짓들을 감행합니다. 인간성이 파괴되며, 예의, 도덕, 상식, 교양이 사라지며 인간 속에 잠재하는 모든 악이 적나라하게 표현되며 총집합합니다.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 젖먹이를 그 어미가 보는 앞에서 공으로 삼아 축구를 하고, 핏덩이가 된 어린 시체를 개에게 던지고, 구두에 묻은 피를 그 어미로 하여금 자기 브라우스를 찢어 닦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젠탈 (Simon Wiesenthal)이 보고했습니다. 전쟁이 아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짐승보다 악하게 만듭니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 (Karl Jaspers)는 이런 것을 보고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 일어납니다. 전쟁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인류역사 약 5600년 동안에 크고 작은 전쟁이 14,500번 있었고 역사의 91.6%가 전쟁으로 채워졌다 합니다. 지난 3400여 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다 합니다. 그리고 약 35억 명이 전쟁에서 생명을 잃었고, 20세기에만 전쟁과 혁명으로 약 9억 명의 생명이 살상되었다 합니다.

 

심지어 평화조차도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는 전쟁에 의해서 얻어 진다 (pax quaeritur bello)”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얻은 평화도 전쟁을 준비 한다 (pax paritur bello)"고 합니다. 즉 평화를 위해서라도 먼저 전쟁을 알고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3. 폭력이 가진 위험에 대한 성경적 경고

 

왜 그럴까요? 전쟁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26:47-56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반응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항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있었고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입을 맞춘 것은 비열한 배신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그리고 나에게 칼이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 수 있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매우 비겁한 자라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칼빈은 베드로가 조금 후에는 주님을 부인할 만큼 비겁했는데 여기서는 어리석게 만용을 부렸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가 칼을 뺀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원히 비겁한 사도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상대가 무기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하는 짓이 너무 비열하고 억울했기 때문에 폭력을 쓴 것입니다. 나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큰 상처를 가하고 너무 억울하게 행동하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막고 그것에 대항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정의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휘두른 칼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만 자르고 말았습니다. 아마 예수를 체포하는 것 구경하러 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엉뚱하게 무고한 사람만 억울하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폭력행사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이며, 전쟁에서는 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민간인들이 무수하게 억울한 희생을 당합니다. 이번 연평도 포격에서도 두 사람은 군인도 아닌데도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52)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주님은 ( 5:39-42)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꾸짖음과 같은 뜻입니다.

 

4. 기독교는 반전론자인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보편적인 원칙으로 만들면 평화주의 혹은 반전론 (pacificism)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어떤 경우에도 무기는 들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주장입니다. 모든 전쟁은 비참하고 의도하지 않았던 온갖 악이 다 저질러지며 인간이 악마처럼 되는 것을 고려하면 평화주의의 주장은 옳고 고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평화주의자가 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평화주의는 너무 고상하고 이상적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인간 집단은 더 이기적입니다. 그런 평화주의는 악한 자에게 모든 이익을 다 안겨주고, 그들의 악을 더욱 조장하는 매우 무책임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예수님도 평화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현실적인 교훈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적이 공격해 와도 무기를 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 대는 것은 개인에게는 요구될 수 있습니다. 자기 개인만 희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집단 간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다른 구성원들의 이해가 같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군이 공격해 오는데 많은 사람이 평화주의자가 되어 무기를 전혀 들지 않으면 전쟁에 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만 해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국 군인들과 한국 시민들 모두가 그 피해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상이 고상한 것은 좋으나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군인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었을 때 ( 3:14)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을 뿐 무기를 버리고 전쟁을 하지 말라 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로마 군인 백부장이 무기를 쓰는 군인이란 사실을 잘 아셨겠지만 그의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정부가 공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칼이 필요함을 인정했습니다 (13:3).

 

 

5.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서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전쟁에 다 참여해도 됩니까?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한 것이 과연 정당합니까? 사실 여러 사상가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두고 많이 고심했습니다. 그 고심의 결과가 바로 소위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론입니다. 어떤 전쟁은 정의로울 수 있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역사상 정의로운 전쟁이론을 제일 먼저 제시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론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106-43B.C.)가 제시하였습니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1) 전쟁의 유일한 정당성은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다. (2) 전쟁은 모든 협상이 다 실패했을 때 수행하는 최후의 선택이다. (3) 전쟁은 적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4) 전쟁의 목적은 정복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5) 포로나 항복하는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6) 다만 법적으로 군인이 된 자들만이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들입니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오늘날에도 원칙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조건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어기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지침은 그 형식만 지킬 뿐 그 본래의 의도대로 준수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자국의 비행기가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기 위하여 거의 현지에 가 있을 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키케로의 세 번째 원칙은 지켰지만 형식에 불과합니다. 공격적인 전쟁은 나쁘지만 방어를 위한 전쟁은 용인될 수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오늘날 전쟁 당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의 전쟁이 방어 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비행장을 먼저 폭격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그것도 방어 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랍 국가들이 곧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선제공격 (pre-emptive strike)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연평도 사건과 관계해서도 북한은 자주권 수호를 위하여 포격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국가의 위선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 나라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전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격의 것이든 지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칼빈과 루터 등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도 참여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서 고심하였고 키케로의 주장과 비슷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하면 (1) 전쟁이 불가피함을 결정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위가 있어야 한다 (There must be a legitimate authority to decide upon the necessity of a war.) (2) 전쟁을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무기를 드는 것 보다 더 큰 심각한 악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There must be an evident casus belli, a serious cause which would justify the use of weapons as the lesser evil). (3) 방어해야 할 에 합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즉 전쟁을 통해서 극복하거나 피하려는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The means employed must be appropriate to the good that is to be defended and not cause greater damage than the one that should be overcome or avoided by that war.) (4) 전쟁은 최후의 선택이라야 한다. 외교적인 수단으로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다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War should only be resorted to as ultima ratio, the very last means to be used after preceding attempts to settle the conflict diplomatically have failed.) (5) 전쟁은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도록 계산되어야 한다 (The war should be calculated in such a way that it could be ended in a foreseeable time.) (6) 전쟁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재난보다 훨씬 더 좋아야 한다 (The outcome of such war should be a general situation far better than the calamity which caused the war.)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키케로의 조건과 기독교의 조건들이 유사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입니다. 키케로는 국가의 명예와 안전 방어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 한 반면 기독교에서는 악의 제거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전쟁의 대부분이 국가들 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키케로에게는 자기 나라의 명예와 안전 그 자체가 정당한 가 않은 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의 것이면 무조건 방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합법적 권위로서의 국가를 인정할 뿐 자기 나라의 명예나 안전은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는 사상은 없습니다. 자기 나라가 악한 동기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악이 그것이 제거하려는 악보다 더 크면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6.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증진시켜서 전쟁을 억제해야

 

이것은 물론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가의 이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과 불의를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애국은 무조건 우리나라가 강하고 부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정직하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는 것이며, 그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필요하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름멜 (R.J. Rummel: Democracies Don't Fight Democracies), 로울즈 (H. Rawks) 등의 정치 철학자들 간에는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판적인 학자들이 없지 않으나 최근에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그럴 개연성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북한과의 전쟁을 피하려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강화해야 하겠지만 특히 북한이 민주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큰 복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북한이 민주화될 수 있을지는 알기가 쉽지 않으나 민주화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라도 감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민주화에 앞장 서야 하고, 교회도 민주적으로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북한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번 군사훈련이 평화롭게 끝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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