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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운동 (설동훈 1992-2002년)

희년선교회 2024. 2. 26. 21:17

설동훈. 2003.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운동, 1992-2002년." 김진균 편,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 2: 한국사회운동의 흐름과 지형}. 문화과학사. pp. 76∼99.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운동, 1992∼2002년

설동훈(전북대, 사회학)

2002년 1월 21일부터 26일까지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아모르가구에서 근무 중인 외국인노동자 100여 명이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집단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2001년 11∼12월의 두 달치 임금 약 3억 원을 지급해달라며 1월 21일 점심시간부터 파업을 시작하여, 공장의 모든 생산이 중단되었다. 회사측은 파업 발발 초기에 기숙사에 단전 및 단수를 하는 등 물리적 탄압을 하고, 불법체류 신분이라는 약점을 악용하여 "체불임금을 지급할 수 없으니 모두 회사에서 나가라, 말을 듣지 않으면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하여 추방시키도록 하겠다"는 식으로 강제추방 협박을 하며, 또 파업을 계속하면 회사는 폐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등 엄포를 놓는 한편, "일단 작업장으로 복귀하기만 하면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식의 회유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국내 주요 언론에 보도되고,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등 국내 시민단체가 참여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1월 24일 노사 양측 대표들은 네 차례의 협상 끝에, 회사는 밀린 두 달치 임금을 1월 26일에 전액 지급하고, 외국인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킨 데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밀린 임금이 지급된 1월 28일부터 외국인노동자들은 정상 조업을 재개하였다.


그 동안 외국인노동자의 차별 철폐와 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연좌농성이나 가두시위를 벌인 적은 있었으나, 사업체에서 외국인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켜 사회적 주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외국인 미등록노동자는 그들의 체류자격이 '불법'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끼리의 집단행동은 엄두도 내지 못해 왔다. 외국인 산업연수생은 체류자격은 합법이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사용자가 연수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송환시킬 경우 속수무책이므로, 그들 역시 집단행동을 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처럼 외국인노동자가 집단행동에 참여하기 힘든 상황에서 발생한 아모르가구 파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대한 외국인노동자의 인내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아모르가구 집단 항의 시위는 1987년 이후 누적되어 온 중소제조업체에 취업 중인 외국인노동자 처우 및 불법체류 외국인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한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외국인노동자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단결하였고, 그것을 쟁취한 역사적 사건으로써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에도 외국인노동자의 집단적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을 기획하는 데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는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운동이다. '외국인노동자 운동'은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사회운동'과 '외국인노동자 자신들의 사회운동'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모르가구 파업을 제외하고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운동을 조직하고 수행한 사례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다룰 외국인노동자 운동은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활동'으로 제한됨을 미리 밝혀두기로 한다.


1. 한국정부의 외국인력 정책: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 수입

한국정부는 '출입국관리법'을 통하여 외국인의 국내 취업관련 사증 발급을 제한함으로써 외국인노동자의 국내 유입을 규제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취업 사증 발급 시 고려하는 기준은 '보완성의 원칙'이다. 보완성의 원칙이란 내국인으로 충원하지 못하는 특수 전문업종에 한해,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제한된 규모의 취업 관련 사증을 발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내국인이 노동시장에서 외국인노동자에 의하여 대체되는 것을 예방하고, 보완적인 외국인력만 수입함으로써 내국인노동자의 임금·노동조건·생산성의 저하를 막으려는 목적에서 고안된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출입국관리법'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취업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교수·회화지도·연구·기술지도·전문직업·특정직업 등 전문기술 분야로 제한함으로써, 단순기능직 외국인노동자의 국내 취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여 왔다.


그러나 단순기능직 외국인노동자 '취업' 금지 원칙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노동시장에서 내국인으로 채워지지 않는 직종은 전문기술직뿐 아니라 단순기능직도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엽 이후 국내 중소 제조업체와 건설현장에서는 생산기능직 인력난에 봉착해 있었다. 1987년 무렵부터 자발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노동자들이 이러한 인력 공백을 메워주었다. 그들은 주로 관광 사증으로 입국하였다가 체류기간을 초과해서 취업한 미등록노동자들이었다. 1987∼1991년 정부는 미등록노동자의 취업을 묵인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 사이 미등록노동자의 수는 1989년 12,136명, 1990년 18,402명, 1991년 41,877명으로 급증하였다.


생산기능직 인력난은 제조업과 건설업뿐 아니라 광업에서도 매우 심각하였다. 정부는 1991년 2월 석탄광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재중동포 인력을 수입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국내 노동조합은 한국인 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침해할 것이라며 극렬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비롯한 사용자 단체는 인력부족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정부에 계속 요청하였다. 정부는 1991년 11월 1일부터 외국인 '근로자'가 아니라 '산업연수생'을 중소제조업체에 공급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산업연수생은 엄연히 '근로'를 하는 '노동자'이지만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을 악용하려 한 것이다.


1991년 도입된 외국인 산업연수제도는 해외투자기업에 한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내 중소제조업체는 그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해외 현지법인이 없는 기업에도 그 문호를 개방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인력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등록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불법체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산업연수제도의 확대 실시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에는 미등록노동자 수가 65,528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불법체류 외국인 자진신고 기간을 설정하여, 그들을 순차적으로 귀국시키면서, 대체인력을 산업연수생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면서 1993년부터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해외투자 실적이 없는 기업에도 산업연수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994년부터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수입 창구로 산업연수제도를 확대 실시하였다. 아시아 14개국에서 8만 명의 산업연수생을 수입하였다. 즉, 정부는 산업연수제도를 한편으로는 국내 중소제조업 인력난 대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미등록노동자 해소 대책으로 사용하였다.


산업연수제도는 실제로는 노동력을 활용하면서도 그 노동력의 주체를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권압류·감금노동·사업장내 폭행·저임금·임금체불 등의 인권 침해를 유발하였다.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부는 1998년 4월부터 산업연수제도를 수정한 연수취업제도를 실시하였다. 2년간 산업연수를 거친 사람에게 소정의 시험을 치르게 한 후 합격하면 1년간 취업을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2002년 1월부터 이 제도를 다시 수정하여 '1년간 산업연수, 2년간 취업'으로 그 방식을 변경하였다.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산업연수제도와 연수취업제도는 미등록노동자를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불법체류자'를 없애기 위해 도입한 산업연수생의 대부분이 사업체를 이탈하여 미등록노동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입국 규제에도 불구하고 관광 사증을 발급받고 입국하여 미등록노동자가 되는 사람도 계속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미등록노동자 수는 계속 늘어나 2002년 4월말에는 268,258명으로 전체 외국인노동자 수 339,960명의 78.9%에 이르렀다. 미등록노동자들은 한국의 인력난을 해결하며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어 일하는 탓에 임금체불·산업재해·직업병·부당해고 등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정부의 외국인력 정책은 공식적으로는 산업연수제도·연수취업제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등록노동자를 활용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편법이다.


2.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조직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한국에서 일했던 외국인노동자는 극심한 임금체불·산업재해·폭행·성폭행 등 매우 심각한 노동권 및 인권침해에 시달렸다. 피부색이 검고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또 그들이 힘든 일을 묵묵히 감수하며 일한다는 점을 빌미로, 그들에게 차별대우를 일삼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한국인에 의한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침해 문제가 등장했을 때 그들을 누구보다 먼저 보살펴 주었던 사람들은 곧 이어 사회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들이 있었기에, 한국은 '현대판 노예제'라는 오명을 듣는 외국인력제도를 갖고 있지만, 나락으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1) 외국인노동자 단체의 결성 추이


국내 사회단체가 외국인노동자 지원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0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때는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종교활동에 치중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단체가 설립된 것은 1992년으로 보아야 한다. 1992년 5월부터 필리핀 출신 사제들이 매주 일요일 오후 서울 자양동성당에서 타갈로그(Tagalog) 미사(mass)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수백 명의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모이는 것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동시에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침해 사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기 위한 시민운동 단체가 발족하였다.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본격적 관심을 표명한 최초의 단체는 1992년 5월에 결성된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이다.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은 자양동성당에서 체불임금 해결, 산업재해 보상, 폭행사례 해결 등의 기초적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상담 지원 활동을 하였다.


1992년 8월에는 명동성당 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외국인노동자 상담소'가 설립되었다. 백월현·정귀자·최성 등이 대표 및 실무자로 활동한 이 단체는 임금체불·산업재해·폭행피해 등 노동상담과 출입국관련 문제에 대한 상담 활동을 하는 한편, 외국인노동자들끼리의 상호부조를 위한 자치체 결성을 지원하였다.


1992년 11월에는 구로동에서 '외국인노동자 피난처'(대표: 김재오)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최초로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쉼터(shelter)를 제공하였는데, 그 후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는 대부분 쉼터를 병설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인 1992년 11월 27일,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 위원회'를 설립하고, 사무실을 구로동 갈릴리교회에 두었다.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인명진 목사)에서는 의료지원팀을 구성하여 일요일 오후마다 교회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하면서 상담도 진행하였다.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는 외국인노동자 무료 진료를 최초로 시행한 단체다. 또 그 무렵 '희년선교회'(대표: 이만열, 간사: 강명규)가 발족하여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상담과 의료지원활동 및 쉼터 제공 서비스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기존 노동상담소에서도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상담활동을 개시하였으며, 그들의 인권실태 조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예컨대, 구리노동상담소(소장: 박무영)에서는 1992년 가을에 외국인노동자 고용업체 실태 조사를 수행하였다.
1993년 초부터 국내에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형태의 지원 단체들이 서울·수도권에서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가 가장 많이 설립된 때는 1994∼1997년이다. 이 때는 국내 기업들이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통해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을 수입함에 따라, 외국인노동자 수가 급증한 때였다. 한국 정부는 산업기술연수생으로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를 대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기대와는 달리 미등록노동자 수는 오히려 더 증가하였으며, 외국인노동자 인권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된 이후인 1996∼1997년에는 부산·대구·광주·창원 등 지방 주요 거점도시에서 본격적으로 외국인노동자 지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표 2>에는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사회부문별 분포가 제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천주교·기독교·불교·이슬람교 등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띤 단체들이다.


먼저, 천주교에서는 안양 '전 진 상 복지관'의 이금연 관장이 1993년 1월 외국인노동자 대상의 상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대구(대구 가톨릭 근로자회관, 1993년)·인천(인천 가톨릭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1993년)·시흥(시화 일꾼의 집, 1993년)·부산(부산 가톨릭 노동상담소, 1994년)·수원(천주교 수원교구 외국인노동사목 엠마우스, 1995년)·구미(구미 가톨릭 근로자센타, 1996년)·안산(천주교 외국인노동자 사목센터 갈릴레아, 1997년)·창원(창원 가톨릭 사회교육회관 외국인노동자센터, 2000년)·의정부(이주노동자상담소, 2000년)·익산(가톨릭노동상담소, 2000년) 등 전국 각 지역에 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개설하였다. 천주교회가 하나의 단일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천주교 계통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는 거의 대부분 각 지역 교구 노동사목회 관할 하에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음, 개신교에서는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 위원회'를 발전시켜 1993년 9월에 초계파 개신교 단체인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전국 조직을 갖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초계파 조직인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 협의회'는 그 후 개신교 교회들이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94년부터는 외국인 산업연수제도가 확대 실시되면서, 외국인노동자 인권 문제가 매우 심각해지기 시작하였던 시기다. 이 때 성남·안산·부천·남양주·인천 등 수도권 각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 상담소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많은 곳은 순수한 교회로 존재하지만, 교회에서 독립하여 운영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1994년 4월에는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소장: 김해성)이 개소되었고, 1994년 10월에는 '안산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소장: 박천응)가 설립되었다. 김해성 목사와 박천응 목사는 도시노동자 및 빈민운동에 종사해왔던 사람들로, 그들은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노동권 보장을 위한 사회운동을 표방하였다. 1995년에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외국인여성노동자상담소'(대표: 김윤옥)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서울 외국인노동자 센터'(소장: 최의팔)가 설립되었다. 성공회 서울교구 남양주교회에서 외국인노동자 목회를 하던 이정호 신부는 1997년 6월 '샬롬의 집'을 설립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경남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대표: 이철승)와 '광주 외국인노동자 센터'(대표: 이철우)가 설립되었다. 1998년에는 '한국교회 외국인 노동자 선교 협의회' 초대 총무를 지냈던 유해근 목사가 구의동에 '서울 외국인근로자 선교 교회'를 설립하였다.


개신교 단체 중에는 외국인 중 하나의 민족이나 국민만을 보살피는 곳도 생겨났다. 1996년 6월에는 '서울조선족교회'(서경석 목사)가 창립되어, 주일예배를 보면서, 한방진료·이발봉사·임금체불상담·국적확인·영화감상·직장알선 및 자녀의 한국방문 프로그램 등 재중동포를 돕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경기도 일산의 '게르방교회'(함덕신 목사, 1997년)는 몽골인, '대구서부교회'(김우석 목사, 1998년)는 베트남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한편, 불교 계통의 외국인노동자 단체도 설립되었다.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을 중심으로 1994년 1월 '외국인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불교대책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2월에는 구의동 영화사에서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하는 인간방생 기원법회'를 개최하면서 불교신자가 많은 네팔노동자를 중심으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사업을 펴나갔다. 1995년 4월에는 조계사·불교시민단체협의회·실천승가회·구룡사 등이 주축이 되어 조계사 내에 '외국인노동자 마을'(간사: 정진우)을 개소하여 외국인노동자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외국인노동자 마을'은 2000년 11월 '외국인노동자 인권문화센터'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001년 11월에는 경기도 김포에 제2상담소를 설립하였다. 한편, 1996년 12월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대표: 법륜)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1999년 5월 '좋은 벗들'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원불교는 2000년 2월 '서울 외국인 센터'(최서연 교무)를 설립하여 외국인노동자 지원활동에 동참하였다.


이슬람교는 별도의 전문적 상담기관을 설치하지는 않고, 교회에서 인권보호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 이슬람 성원'(대표: 전득린)이 대표적인데, '광주 지역 외국인 무슬림 보호 협의회'를 결성하여, 회원들을 중심으로 외국인노동자 권익 보호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순수 시민단체의 성격을 갖는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도 설립되었다. 1992년 5월 설립된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에 이어, 1994년 5월에 '중국노동자센터'(소장: 오천근)가 문을 열었고, 1995년 3월에는 '부천 외국인노동자의 집'(대표: 임영담, 사무국장: 예영주)이 설립되었다. '부천 외국인노동자의 집'은 불교 사찰인 석왕사의 부속건물에서 시작하였으나, 종교기관이 아니라 시민단체를 표방하였고, 그 후 석왕사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또한, 1996년 10월에 '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대표: 정귀순)이 설립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1998년부터는 서울 동대문에서 '푸른시민연대'(대표: 문종석)가 외국인노동자 노동상담과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001년 4월에는 인천에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소장: 양혜우)가 설립되었다. 또한 2001년 5월에는 비정규직과 외국인노동자를 아우르는 평등노동조합을 표방하는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지부장: 이윤주)가 설립되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의료문제를 근본적이고 조직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에서는 1999년 9월 '외국인노동자 의료공제회'(운영위원장 : 최의팔)를 설립하였다. 외국인노동자 의료공제회는 전국 각 지역의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와 연계하여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각 종교단체와 연관된 의료 단체도 있다. '라파엘 클리닉'(대표: 김전, 1997년)은 천주교회와 연계하여 활동하고, '선한 이웃 클리닉'(대표: 임한종, 2000년)과 '한국기독의사회'(대표: 김상순, 2000년)는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펴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들도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1994년 12월 '외국인노동자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무료 법률 상담을 하고 있고, 1997년 1월부터는 의정부에서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법률구조센터'(손광운 변호사)가 운영되고 있다.


[그림 1]에 제시된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설립 추이는 대체로 외국인노동자의 증감 패턴과 일치하고 있다. 1998년은 한국경제가 "소위 IMF 신탁통치를 동반한 심각한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 외국인노동자들의 귀국 행렬이 이어지면서 국내 외국인노동자 수도 감소하였고, 따라서 신설된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 수도 대폭 감소하였다. 1999년 이후 경기가 호전되면서 외국인노동자 수도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설립도 다시 활발해졌으며, 2000년에만 11개 단체가 설립되었다.

2)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네트워크 형성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최초의 시도는 1993년 9월에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된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한일 연대회의'였다. 이 회의는 그 당시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세 갈래 세력, 즉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것이었다. 이 연대회의에는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관계자가 거의 전원 참석하여, 각 단체의 경험과 노하우(knowhow)를 공유하면서 연대를 꾀하는 한편, 일본의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와 교류를 시도하였다. 일본 측 참석 단체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대하는 모임'(外國人出稼ぎ勞 者と連帶する會, 일명 カラバオの會), '체일 외국인노동자와 연대하는 모임'(滯日外國人と連帶する會), '전통일노동조합'(全統一勞動組合),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神奈川シティユニオン) 등이다.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은 시민단체의 연대 조직의 모습으로 발전 전망을 갖추려 하였으나, 조직의 통합에 실패한 후, 많은 상담소 중의 하나로 위상을 재정립하였다. 개신교를 아우르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었던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 선교협의회'는 최근 들어 활동이 소강상태에 있는 반면, 대신 교단별 선교협의회가 구성되어 연대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의 '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외국인노동자선교후원회',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 감리교 '외국인근로자선교협의회' 등이 구성되어 있다. 한편, 가톨릭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들은 공동행사를 1년에 1∼2회 정도 개최하고 상호 정보교류 등의 공동 사업은 진행해 왔지만, 가톨릭교구의 반대 때문에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가 주도하는 강력한 연대 틀은 구축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제 각각 분산된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던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이 한 데 묶이게 된 계기에는 세 차례에 걸친 공동 투쟁이 있다. 첫째, 1993년 11월 9일 오전에 재중동포 노동자 임호 씨가 불법체류에 대한 과다한 범칙금 징수에 항의해 영등포의 한 고가도로에서 투신 자살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 특필되었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에서는 '외국인노동자피난처'·'희년선교회'·'재한외국인선교교회' 등이 함께 목동 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정부의 외국인노동자 정책에 항의하는 최초의 시위를 벌였다. 임호 씨 자살사건은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가 처음으로 연대하여 활동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둘째,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치료와 피해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등록노동자들이 1994년 1월 10일부터 2월 7일까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강당에서 농성을 하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인노동자 피난처'와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등이 중심이 되어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셋째, 열세 명의 네팔인 산업기술연수생들이 1995년 1월 9일부터 17일까지 명동성당에서 천막 농성을 하였다. 그들은 '입국 후 7개월이 지나도록 연수수당을 전혀 받지 못했고, 송출업체를 통하여 본국으로 송금해 준다고 하였지만 송금되지 않았으며, 한국인 관리자들의 폭행·폭언 등을 견딜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월급 주세요"라는 구호로 자기들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나타내었다. 이 때 한국의 사회운동 단체들도 이들의 문제 해결에 동참하였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및 상담 단체 뿐 아니라 시민운동·노동운동을 포괄하는 38개 단체가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95년 7월, 명동성당 농성 당시 결집된 38개 단체들 중 일상적으로 지원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인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부천 외국인노동자의 집', '중국노동자센터', '외국인노동자마을', '시화 일꾼의 집', '천주교 수원교구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안산 외국인노동자 센터' 등 10여 개 단체가 외국인노동자 공동체(네팔·방글라데시·중국·스리랑카)와 함께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국내 외국인노동자 운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 연대 틀이 구축되었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국내 노동조합과 외국인노동자 공동체와의 연대를 모색하였고, 산업연수제도를 철폐하고 '노동허가제도'를 실시하려는 외국인력제도 개선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외국의 이주노동자단체들과도 연대를 모색해 왔다. 외국인력제도 개선 투쟁의 일환으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2002년 7월 28일 국내 "민주사회단체"와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 169개를 회원으로 하는 '산업연수제도철폐와 강제추방반대 투쟁 본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투쟁 본부는 2002년 8월 29일 그 명칭을 '외국인이주노동자 강제추방반대, 연수제도철폐 및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로 변경하였다.



3.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활동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활동은 ① 외국인노동자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상담과 복지 및 교육 활동, ② 외국인노동자 공동체 지원, ③ 외국인노동자 권리 확보 운동, ④ 외국인력제도 개선 운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상담·복지·교육 활동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은 외국인노동자가 취업과 일상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단체들의 주된 활동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외국인노동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그것을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무료상담을 통해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대부분 임금체불(84.1%)·의료(81.4%)·산업재해(76.8%)·여권(69.6%)·폭행(46.4%) 등 각종 고충상담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이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 상담한 내역을 보면, 노동기본권 문제가 상담내용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임금체불 문제가 가장 많다. 그 외 노동기본권에 대한 상담 내용은 외국인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한 경우 그에 대한 보상 방안 협의, 노동시간·임금·차별대우 등 노동법에 대한 법률상담, 그리고 사업체에서의 폭행 피해에 대한 호소 등이다. 출입국 관련 문제는 여권 압류, 벌금, 보호소 수감, 항공권 환불 등에 대한 상담 활동이고, 보건의료 상담은 직접 진료소를 운영하여 치료하거나, 병원을 소개하기도 하고, 상담원이 외국인노동자를 직접 데리고 가서 입원시키기도 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기타 상담은 다양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일반 상담은 음식·언어·이해관계·결혼·기숙사·화재·교통사고 등 외국인노동자가 한국사회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고, 쉼터 제공은 당장 기거할 곳이 없는 산업재해 피해자, 사업체 이탈자, 해고자 등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며, 사망사고 처리는 교통사고·화재·실족·과로로 인한 사망이나 자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거나 보상대책을 마련하는 활동이다.


둘째,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 중에는 외국인노동자의 쉼터(피난처, 숙소)를 제공하고 있는 곳도 여러 군데 있다(42.0%). 여기에서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외국인노동자나,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쉬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셋째, 의료지원을 하는 곳도 있는데(76.5%), 대개 주말에 간이진료소를 설치하여 무료 또는 염가 진료를 해주는 방식을 취한다. 넷째, 한국어 강습을 실시하는 곳도 여러 곳 있다(85.5%).



2) 외국인노동자 공동체 지원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은 각국의 외국인노동자 자체 조직 결성을 지원하여 왔다.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 중 35.8%는 외국인노동자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필리핀(1992년, Sampaguita Philippines Community), 네팔(1993년, Nepalese Consulting Committee), 미얀마(1993년, Myanmar Association), 방글라데시(1993년, Bangladesh Workers Welfare Association), 스리랑카(1997년, Sri Lank Independent Association), 인도네시아(1998년, ISWARA) 등 출신국별 외국인노동자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은 외국인노동자 조직과 연대 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공동으로 단체행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공동체들은 분화 또는 확대 과정을 거쳐오면서, 1998년 전국 조직 결성 시도로까지 나아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이주노동자기구(International Migrant Workers Organization in Korea: IMOK)의 결성을 위하여 1998년 6월 13∼14일에 대성리에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후속 모임으로 지역별 외국인노동자 대표자 연석 회의가 있었으나, 이 모임을 주도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실무자의 진행상 부주의와 배제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였고, 결과적으로 각 상담 단체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비화되면서, 모임이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1995년 10월에 외국인노동자 공동체들과 국내 노동조합간에 자매 결연을 맺어 주기도 하였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노동조합은 줄곧 외국인노동자에 대하여 사실상 무관심하였다. 물론 전국단위 연맹 수준에서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단위 노동조합 수준에서 외국인노동자의 차별 대우 시정을 위한 적극적 노력을 기울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요컨대, 국내 노동조합의 입장은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도'를 실시하여 이주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는 정도일 뿐, 외국인노동자를 조직화할 준비는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2001년 이후 경기도 마석에 기반을 둔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 주도로 외국인 미등록노동자들을 노동조합원으로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다. 노동조합을 통해 외국인노동자를 조직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좋으나, 조합원의 체류자격이 "불법"이라는 점 때문에 일상적인 노조활동 즉 단체교섭이나 단체행동이 쉽지 않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3) 외국인노동자 권리 확보 운동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현행 제도 하에서 외국인노동자가 최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외국인연수생과 미등록노동자가 '근로자'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들은 시위와 농성 및 소송 등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켜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실태를 고발함으로써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근로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던 외국인노동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조금씩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다.

1994년: 미등록노동자에게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1995년: 산업연수생에게 산업재해보상보험·의료보험 적용, 최저임금·폭행금지 등 근로기준법 8개 조항 적용
1997년: 미등록노동자에게 퇴직금 지급 결정
1998년: 미등록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1999년: 해외투자법인 연수생에게 최저임금·폭행금지 등 적용
2000년: 산업연수생에게 퇴직금 지급 판결, 미등록노동자 가정의 어린이 초등학교 입학 허용

그러나 아직도 산업연수생이 '근로자'냐 아니냐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미등록노동자는 신분이 노출될 경우 강제퇴거 당해야 하므로 인권 침해를 당했을 지라도 정부에 구제 요청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 산업연수생과 미등록노동자 모두가 언제든 지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외국인력제도 개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4) 외국인력제도 개선 운동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1995년 10월 '외국인노동자 보호법' 시안을 마련하였다. 1996년과 1997년에는 '외국인노동자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며 지원 단체와 외국인노동자가 함께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1996년 말에는 '외국인노동자 보호법'을 국회에 입법 청원하였다. 이 때 입법 청원한 보호법안은 '노동허가와 고용허가 병행'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입법청원안은 국회에서 계속 잠자다가 2000년 5월 29일 제15대 국회 종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대신 기존의 산업연수제도를 소폭 개선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연수취업제도를 1998년 4월 1일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2000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노동허가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외국인노동자 고용 및 인권보장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다시 시도하였다. 1995년의 '보호법'이라는 표현이 평등하지 못한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같은 시기, 노동부는 '고용허가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외국인근로자 고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려 시도하였는데, 이에 대해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산업연수제도 폐지'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안으로 보고 지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000년의 법 제정 시도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한편, 2002년 7월 15일과 11월 22일에 걸쳐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한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과 '외국인력제도 보완대책'을 발표하였다. 현재 제조업·건설업·수산업에 한해 실시되고 있는 산업연수제도를 농업과 축산업까지 확대해 적용할 뿐 아니라, 그 도입규모를 대폭 늘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들은 매우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단체들은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도'를 도입하여 외국인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인권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국제연합의 '모든 이주근로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1990년)의 비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1998년 12월 9일 한국정부의 '모든 이주근로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 비준을 촉구하는 각계인사 300인의 서명을 받아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8일에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에서는 기념예배와 토론회를 통해 한국의 교회와 각 교단이 12월 18일 주간을 이주노동자의 주간으로 설정하여 예배를 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1999년에는 안산역에서 집회를 열어 서명 촉구 손도장 찍기 및 시민들에게 풍선 나눠주기 행사 등을 진행하였다.

4.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분화

'주요 활동 분야와 단체간 연대'라는 두 기준으로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를 분류하면 세 가지 유형이 도출된다. 제1유형의 집단은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에 소속되어 있는 39개 단체이다. 이 단체들은 종교나 지역에 관계없이 연대를 꾀하고 있으며, 사회적 발언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제2유형의 집단은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에 참가하지 않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로서, ① 서울·인천 등 가톨릭 교구의 공식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②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 선교협의회'나 교단별 선교협의회에만 소속된 개신교회(또는 부속 상담소), ③ 2001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에서 탈퇴한 3개 단체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이주·여성연대', ④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 등이다.
제3유형의 집단은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선교'에 더 관심이 높은 종교단체들이다. 여기서 제3유형의 집단은 사회참여에 별 다른 관심이 없으므로 다른 유형의 집단과 대립 축이 형성되지 않으나, 제1유형과 제2유형의 집단간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는 '현행 외국인력제도인 산업연수제도에 대한 태도'와 대안으로서의 '고용허가제도에 대한 평가'다. 제2유형에 속하는 '서울조선족교회'는 산업연수제도의 확대 실시를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제1유형의 단체들은 산업연수제도를 '현대판 노예제도'로 간주하여 당장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도'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되 노동부의 '고용허가제도'는 차선책(次善策)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제2유형의 단체들 중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는 고용허가제도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둘째는 2002년 불법체류자 자진 신고에 대한 대응 방안이다. 제1유형의 집단에서는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전면 거부는 성공적으로 하면 큰 성과를 볼 수 있는 운동방법이겠지만 현재 내부 역량 상 성공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외국인노동자에게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주고 판단은 본인이 하도록 한다"는 입장을 정하여, 사실상 "1년 간이라도 미등록노동자에게 합법체류를 부여하는 게 낫다"는 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제2유형의 '서울조선족교회'와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는 처음에는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를 전면 거부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외국인노동자에게 권고한다"고 방침을 정하고 극렬히 저항하였다가, 나중에는 거의 대부분 자진신고를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이처럼 분화된 정책 중에는 토론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가치관과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연대를 도모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일시적 제휴관계는 가능하겠지만 연대를 도모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다. 즉,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간 연대를 꾀하되, 정책과 방법에 대한 합의가 있는 단체들로 그 범위를 엄격히 정하는 게 필요하다.


5.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과제

2003년은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 운동이 태동한 지 고작 1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간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성과가 적지 않다.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한국인들과 외국인노동자가 서로 한데 어울려 살 수 있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도록 하는 데 운동의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단체들은 '외국인노동자'를 시혜(施惠)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개척하는 주체적 존재로 보고 '그들이 국내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운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이질적 문화를 간직한 외국인노동자들과 같이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상생(相生)의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여 왔다. 즉,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는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인들 사이를 매개하며 서로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공유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98년과 같은 극단적 경기침체 시기에도 '한국인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공격적 행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외국인노동자 운동이 이러한 장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자기 혁신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제도 개선 투쟁과 외국인노동자의 주체성 확보 노력과 아울러, 한국인들이 외국인노동자를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한국인의 의식 계몽 운동'도 동시에 벌여야 한다.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앞으로의 과제를 점검하며 글을 맺기로 한다.


첫째, 외국인노동자 자체 조직을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노동자인 이상 '노동허가제도' 또는 '고용허가제도'가 실시되어 노동조합원이 되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다. 그들 자신의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한국인 활동가들이 해결해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매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저축이나 본국으로의 귀환 이후 프로그램 등도 스스로 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자신들이 나서기 전에는 성공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인 활동가들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해결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국인노동자 교육을 더욱 충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단체별로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는 한국어교육, 컴퓨터교육, 노동법교육 등으로,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돈 버는 데 필요한 기능의 습득에 치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교육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신들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둘째,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 사이의 상호 보완적인 협조 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외국인노동자를 도와주기 위한 일반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그것에 덧붙여서 각 단체별로 특화된 활동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개별 단체와 개인 활동가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단체가 모든 활동을 다 잘 할 수는 없으며, 또 백화점식으로 모든 활동을 다 해야하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것을 잘 하는 단체가 있으면 그곳을 서로 소개해주어서, 각 단체가 전문성을 고취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역시 각 단체의 특성을 파악하고 상호 연결을 시켜줄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네트워크는 조직과 시장의 중간 정도 수준이다. 네트워크에서는 단체간의 상하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필요한 경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계(system)를 건설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네트워크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단체와도 연결을 꾀하고, 상호 교류를 지속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은 적극적 참여를 통해 불합리한 정책을 합리적 정책으로 개선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사회운동이 연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뿐 아니다. 한국에 외국인력을 송출하는 나라의 사회운동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여야 한다. 초국적자본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한 나라 사회운동의 힘만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과제는 그 지평을 외국인노동자의 주체성을 배양하고, 국내 외국인노동자 지원 단체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있다. 외국인노동자가 한국에서 '근로자'로서 일하는 한 '동등대우'를 받아야 하고, 문화적으로 차별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