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함께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기
연초부터 주일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설교를 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가?”는 질문에 생전에 R.C. Sproul 박사는 주저 없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라고 답을 했고, 이어서 “그렇다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다시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라고 답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큰 결함은 교회 안에서조차도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무지함과 결핍이라고 덧붙였던 그의 말이 작년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펜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는 깊은 메아리가 울렸습니다.
설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설교자입니다. 여태껏 교리와 신앙고백,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교우들과 함께 계속 공부해왔지만 설교를 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도다.”(롬 11:33)는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가령, 고통을 주심도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라는 (시 119:75) 진리는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제가 씨름하는 문제의 본질은 내가 알고 믿는 하나님이 매우 작은 것이며, 성경이 정의하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내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써 나의 생각과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게 만들기에 하나님 알아가는 것에 대한 중대함과 갈망이 커져 갑니다.
그것은 주일설교만이 아니고 매일의 묵상과 기도회, 그룹 나눔에도 이어집니다. 매일 오전 Tabletalk (리고니어)과 복음묵상으로 개인묵상을 계속하며,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밤 9시에 시편(요즘은 119편을 한두 절씩 살피며)과 함께 하는 기도회를 통해, 그리고 이렇게 주중에 묵상하며 나눈 것을 주일설교와 함께 주일 예배 후에 그룹으로 서로 나누다보면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한 두 시간을 눈물과 기쁨으로 나누며 기도로 마칩니다. 삶이 피곤하고 고단한 이주노동자들이 오는 주빌리교회는 왜 그렇게 자주 모이냐고 할 수 있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는 “날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두려움’(행 4:43) (풍랑이 두려운 게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두려움’, 막4:41)을 일으킨 공동체였다는 것을 늘 새깁니다.
흔히 감당할 시험만 주시니 괜찮다 생각하며(고전 10:13) 선줄로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는 보통의 시험(유혹)만 당하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이고(‘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의 번역) 반대로 말하면 남들이 넘어지는 시험에 나도 노출이 되면 여지없이 넘어질 수 있음을 알고(고전 10:13),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고전 10:12), 죄의 유혹으로 인해 완악해지지 않도록 오늘이라 일컫는 매일 서로의 권면(히 3:13)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성경의 위로 속에서 권면(‘파라칼레오’) 속에 위로자이신 성령(‘파라클레토스’)의 임재가 있기에 카톨릭에서 개신교회를 처음 출석하는 마리카자매는 말씀이 전해듣고 교제하는 주빌리교회에 성령의 임재를 느낀다고 합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룩한 말씀을 통해 역사하셔서 교회로 하여금 거룩하신 주님을 더 알아가고 거룩케 해주시며 거룩한 두려움을 세상가운데 주셔서 거룩하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2. 사방에 은혜, 더욱 주시는 은혜
주님께서 동역자분들의 중단 없는 중보를 사용하시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두 개의 지팡이를 의지하며 걸어야했던 제가 이제 하나의 지팡이로 다니며 교우들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오르내려서 이제 거의 2년이 지나 다시 공장 옥탑의 교회로 올라가 대면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당을 위한 장소는 계속 알아보았지만 부동산 시세가 많이 오른 상태이고 적합한 장소를 아직 찾지 못한 상황에 더 기도하며 알아보려고 합니다. 늘 그래왔지만 요사이 저희를 위해 중보해주시며 사랑을 보내주신 교회와 성도님들을 통해 예수님께 연합된 신자는 그 몸에 함께한 연합된 신자들로 인해 결코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배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드린 감격스런 첫 대면예배를 위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교우들에게 줄 샌드위치와 때에 맞게 보내주신 후원 약품을 함께 포장하여 풍성하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료봉사가 중단되었음에도 사랑은 중단될 수 없어서 남서울평촌교회 의료팀에서는 정성껏 약품을 보내주셨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돌봄이 필요했던 만성질환자들(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에 한해서 희년의료공제회 본부의 섬김을 통해 예약을 통해 진료를 볼 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주빌리교회에 부임한지 10년이 넘은 이 때에 돌아보면 때마다 주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후원교회들과 동역자분들의 한결같은 기도와 사랑으로 인해 사방을 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의 큐브’에 갇혀 그 은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고 이런 저희 현주소 zip code는 다름 아닌 ‘G.R.A.C.E.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왜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실까 하는 생각을 하던 어느 날 야고보서 4:1-10에 묘사된 신자의 내면 속에 꿈틀거리는 죄, 정욕 심지어 세상을 더 사랑하려는 영적 간음으로 인한 갈등과 투쟁 한 가운데 주신 6절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제 마음을 들킨 거 같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주님께서는 평온 속에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부인보다 자기만족과 자기사랑을 원하여 갈등하는 영적인 전쟁 한 가운데 제게 더 가까이 오셔서 제게 절실히 필요 한 것,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더 많은 은혜’를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3. 계속 필요한 은혜
노동문제와 의료문제로 지속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급여마저도 받지 못한 말린 자매와 4명의 노동자들이 노동부에 진정을 하여 체불확인이 되었음에도 사업주가 이의신청을 하는 바람에 다시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싸움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재판에서 승소하고 체불임금 지급명령이 다시 이행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최근에 회사의 내부사정과 개인의 사유로 인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회사를 퇴직하게 된 아또 형제도 퇴직금을 받지 못하여 진정을 해는 상황입니다.
자이메라는 친구가 목과 어깨의 마비증세로 인해 급히 도움을 요청해서 병원을 데려갔는데 뇌졸중 증세를 의심했지만 근육긴장과 신경눌림으로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전에 나오다가 발길을 끊었던 봉 형제가 무릎과 척추의 통증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어 도움을 요청하여 병원을 동행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 3주간에 거쳐 홀로 두 병원을 찾아갔지만 가벼운 증상으로 진단되어 진통제만 처방받았는데 진전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본인은 무릎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척추와 무릎을 다년간 아파본 저로서는 무릎이 아니라 척추쪽에서 문제일 수 있겠다는 판단에 새로 간 병원에서 허리 척추의 사진을 찍어보니 척추의 뼈 하나가 기형으로 자란 것이 원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MRI 정밀 검사를 통해서 만약 후천성 악성으로 뼈가 계속 자란 것으로 판정되면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천성인 것으로 판단이 되어 일단 치료와 약을 통해 다스릴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던 빅형제가 포천의 물류센터로 일터를 옮기면서 교회에 나오기가 쉽지 않게 되었었는데 물건을 옮기다가 콘테이너에서 떨어져 무릎의 뼈가 부서지고 연골도 파열된 데다가 십자인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친 몸보다 병원비와 고국에 생활비를 보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염려와 낙심에 빠진 형제를 위해 빨리 회사의 사장님에게 산재신청을 해서 병원비와 휴업급여 신청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연락을 피하시는 것 같아서 회사에 방문해보니 직원들과 같이 물류센터에서 분주하게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셔서 사무실에 앉아 대화를 하면서 자기와 함께 팀을 이루어 열심히 일했던 빅형제가 다쳐서 사장님은 더욱 마음 아파하시면서 1년이든 2년이 걸리던지 간에 같이 다시 건강해져서 함께 일을 하도록 힘을 다해 돕겠다고 하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연골 수술은 했지만 뼈가 부서져있어서 최소 6개월 이후에 또 십자인대 재건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형제가 교회와 멀리 떨어져있고 홀로 기숙사에 남아 오랜 시간을 투병해야할 걸 생각하니 먼저 본 저는 그게 얼마나 힘든 시간일지 알기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전에 소개되었던 바뎃자매가 원인불명의 마비증세와 몸에 힘이 없어서 계속 일을 쉬어야만 했지만 함께 중보하는 가운데 몸은 점차 회복이 되어 회사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도박과 알콜중독 그리고 자살충동의 문제가 자매를 여전히 옭아매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자매를 위해 함께 기도를 하면 밝아지다가도 사단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다시금 어둠이 드리워집니다. 주께서 자매에게 은혜를 주셔서 꾸준히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기도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환히 비추어주셔서 자유케 해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4. 변함없는 은혜, 고마워 유위야
이전에는 나그네 사역을 하면서 성경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들 유위 덕분에 성경에 나오는 장애를 통해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재고하고 반성하며, 그리고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는 유익과 기쁨이 매우 큽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다가 사무엘하 9장에 나오는 장애를 가진 므비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3절). 다윗이 베풀고자 한 ‘은총’(헤세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변함없고 실패없는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와 같이 여겼습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8절). 므비보셋의 모습은 죄로 인해 죽었고(엡2:1)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행과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는 영적 무능력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비추어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조건과 상관없이 왕의 식탁으로 초대됩니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는 약속과 성취가 반복해서 기록되어있는데 (7,10,11,13절) 마지막 1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13). 앞에서 처음 므비보셋의 상태를 묘사할 때는 “다리 저는 자니이다”(3)라고 하는데 새로운 지위를 얻어 왕의 식탁에 참여하게 이후 그의 상태가 “두 발을 다 절 더라”고 기록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했습니다.
제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죄로 인해 장애정도가 아니라 이미 전적인 부패로 영원한 파멸에 치달았던 저를 마땅히 받아할 그 이상의 과분한 지위와 명예로 부르셨음에도 갈수록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전보다도 더 못한(두 다리를 절더라) 상태로 부끄러운 선교사이고, 이전보다도 더 차가워지고 메마른 것 영혼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여전히 식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감동케 하며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때리는 매보다 더 깊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대를 회개로 이끄시는 것...” (롬2:4). 한편으로는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의 식탁이 외적인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므비보셋의 상태를 바꾸지 않았고, 여전히 혹은 오히려 그는 더 형편이 악화된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보면서 장애를 가진 유위와 나 자신을 과연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체적 혹은 지적 혹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설교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아빠의 손을 잡고 소변을 보러 가고 싶어 단상 앞에 머뭇거리던 유위야,
너의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부요한 은혜로
얼마나 특별한지를 보여주니 고맙다.
유위야, 너와 나의 미래는 아직도 불안하여 주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도 있지만
영원 전에 선택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별을 세라고 하셨을 때 이미 너와 나도 세었단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에 우리를 사랑하신 게 아니라
이미 사랑하셨기에 죽으셨단다. 그 사랑이 너와 나를 특별하게 함을 기억하자.”
일 년에 한 번 정도라도 다음의 교독문을 회중과 함께 고백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해 봅니다.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교독문
(“Praying for All God’s People” by Fred D. Rietema, 번역: 김홍덕)
사회자: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먼저 볼 수 없는 맹인들과 볼 수는 있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회자: 사고나 질병 또는 장애 때문에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너무 빨리 움직여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느낄 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회자: 들을 수 없는 농아인들과 들을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서로서로 반응하게 하소서.
사회자: 더디 배우는 사람, 배우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빨리 쉽게 배우지만 무지한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당신의 지혜 가운데 서로 자라게 하소서.
사회자: 치료의 방법이 없는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병자들과 만성질환에 걸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우리를 고쳐주소서.
사회자: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간병인들과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당신의 눈으로 서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회자: 자신들은 무익하고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회자: 장애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소외감을 주는데 한몫을 하는 사람들에게
회중: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사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소서.
사회자: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존경하며 당신이 주시는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회중: 하나님 자비를 베푸사 서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기도제목
1. 교우들의 3분의 2가 교회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앙의 기본 A부터 Z까지 다시 가르쳐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기본교리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대.소요리문답과 일치신조를 영어와 따갈로그 대조본과 함께 교재(조셉 파이파)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과 매일 성경 한 장씩 나눌 수 있는 가정예배 가이드(조엘비키)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제자훈련이 이루어지고 믿음의 도를 가족들에게까지 전하고 지켜낼 수 있는 신앙이 길러지도록.
2. 말린자매와 4명의 동료들이 임금체불이 확인되었음에도 사업주의 이의신청으로 인해 7월에 있을 재판에서 승소하고 체불임금 지급명령이 다시 이행될 수 있도록. 아또형제의 퇴직금 진정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중독과 자살충동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바뎃자매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자유케 되어지도록.
3. 빅형제가 무릎 뼈와 연골 파열로 수술 후 재활 중인데 뼈가 잘 붙고 물리치료에 진전이 있도록. 목과 어깨의 통증으로 도움을 받은 자이메, 기형적으로 자란 척추뼈로 인해 통증을 수술 없이 약으로 치료되기를 기도하는 봉형제 모두를 오직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롬 16:27)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도록.
4. 하나님의 은혜로 고도.카렌부부(아기 ‘케온나’)가 이제 세례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조조.말린부부(아기 ‘지원’)가 아직 진행중입니다. 두 가정이 그리스도에 대한 ‘구주’되심에 확실한 믿음과 함께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연합하는 세례에 참여하도록.
5. 황호상 선교사가 5월말 경과 검사 이후 8월말까지 재활이 연장되었는데 계속해서 근육이 강화되며 염증과 통증이 가라앉아서 계단도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춘기 딸 겸비와 사추기 엄마 이나연 선교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유위가 특수학급, 복지관, 발달치료센터의 선생님들과 상호작용이 잘 되며 언어, 감각, 인지가 발달되어지도록.
계단을 올라 교우들과 첫 대면예배를 드리고 난 기념
선교묵상
선교하는가? 지켜내는가?
오랜 투병과 코로나로 인한 제한성과 제약성 속에서 선교사면서 목사인 내 자신에게 던지는 아이러니한 질문은 “과연 선교하고 있는가?”이다. “선교는 무엇인가?” 애당초 성경에 ‘선교’라는 용어가 없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성경에는 없지만 성경 전체가 증언하기에 믿고 고백하듯이 ‘선교’는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된 부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논하자면 마태복음 28장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명하신 ‘대위임령’(Great Commission)을 짚어봐야 한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그것을 ‘대(위대한)’ 위임령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대(위대한)’ 위임령이라는 개념은 선교를 마치 ‘위대한’ 혹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특별하고 거창한’ 것으로의 ‘개인적인’ 헌신이라고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사뭇 다르다.
마태복음 28장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위대한’ 자들이 아니라 ‘위태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묘사하기를,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디스타조’-흔들림, 주저함, 망설임)하는 사람들이 있더라”(17절)고 하였다. 제자들은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이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에게서 직접 듣고 배운 자들이었음에도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디스타조)이라는 단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며 두려워 말라하시는 예수님을 듣고 보면서도 거센 바람과 무서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졌던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디스타조) 하였느냐?” (마 14:31)의 ‘의심’과 같은 단어이다.
성경에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라는 구분이 없다. 성경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제자들의 모습이 곧 신자들의 모습이다. 신자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워도 죄와 시험의 풍랑이 휘몰아칠 때면 여지없이 적은 믿음과 의심으로 주저하며 흔들릴 수 있는 위태위태한 자들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오류가 없지만 그분을 따르는 제자요 신자는 오류투성이다. 선교는 이렇게 평범하다 못해 자신의 무능력, 연약함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위대하신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는”(17절) 경외와 예배에서 시작된다. 선교는 이렇게 의심과 불화와 갈등 속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 속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신자는 때로 지금 자신을 처지를 보면 자신의 구원과 믿음마저도 진짜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병 같은 고난에 지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알겠는데 마지못해 그저 억지로 사랑하시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자녀는 장애까지 있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데 대체 무슨 선교를 한단 말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문제라고 하는데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는 것이 고통을 더 가중시키고 마음을 상하게 하여 위로조차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편 77:2-3).
많은 경우에 믿음의 반대를 의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과 의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매우 가깝다. 어떤 면에서 믿음의 반대는 자기의존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의 굳은 신뢰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과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의 기대와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고 낯설기에 의심과 불평이 생길 수 있다. 욥의 인내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그러나 욥은 인내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며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어 쏟아내는 욥의 분노와 불평을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인내하셨다. 욥의 ‘인내’라는 단어는 ‘지속됨, 계속됨’을 의미한다.
욥의 꾸준함과 지속성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할지언정 하나님의 주권을 의심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에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계속 모든 것을 쏟아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은 불신이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불평하는 것은 믿음을 가진 신자의 ‘기도’가 된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 나아가 쏟아놓는 탄식과 비명과 울음이 신자의 기도라는 것을 성경과 무수한 시편이 보여준다. 비록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자들이지만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존재는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의문을 가질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신자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목소리’ 곧 ‘울음소리’(시 6:8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를 내는 것이다.
나는 요즘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나의 상황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어느새 기도소리가 자주 울음소리가 된다. 비록 찌그러진 물통처럼 볼품은 없을지라도 그 안에 마실 물이 있다면 사막같이 목마른 자에게 목을 축이게 할 수 있으니 생수의 복음을 소유한 것으로 충분할 거라는 확신 속에 감사와 희열로 시작한 나그네 사역이 쇠약해진 육체와 아직도 낯설기만 한 하나님의 방식 속에서 시편기자의 “내가 아직 한창때인데도 내 힘을 꺾으셨고.”(시 102:23)가 내 고백이 되었고, 동시에 나는 쇠퇴해져 가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크게 베풀어지고 있음에 놀라서 할 말을 잃은 나는 운다.
나 자신과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과연 제가 선교하고 있나요?” 여전히 망설임과 의심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아와’(프로셀돈)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8절)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나아와’(프로셀돈)라고 표현된 것은 성경에 오직 이곳뿐이다. 그리고 ‘나아와’ 라는 ‘프로셀돈’은 ‘가까이 오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두려움과 의심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확신을 주시는 의도이다.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추궁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며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하신다. “내가 모든 권세를 가졌다. 사단은 내게 이 땅의 영광과 권세로 내게 유혹했지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 나는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했고 다스리는 창조자이자 주권자이다.”
예수님의 모든 권세가 선교의 원동력이다. 선교는 ‘개인’의 능력이나 헌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권세에 대한 담대한 신뢰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에게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제자들, 곧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들 전체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홀로 보내지 않으시고 ‘함께’ 파송하셨다. 주님께서는 한 ‘개인의 결단과 헌신’이 아니라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 교회를 통해 선교를 하신다. 희년국제선교교회와 하나의 교회로 한결같은 사랑과 중보로 그리고 조건 없는 후원과 격려를 보내주시는 또 다른 제자들, 성도들 전체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신다. 선교는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뜻(the whole counsel of God)” (행 20:27)을 전하였다고 했다. 선교는 부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성경’과 더불어 ‘전체 성경’의 구호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내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가르쳐 지키게 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세례와 성찬 신실하게 시행해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체의 가르침과 성례가 시행되는 곳은 다름 아닌 ‘교회’다. 그러므로 선교는 주님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참된 ‘교회의 표지’를 실천함으로 ‘교회됨’으로 세상 가운데 증언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르쳐 ‘지키게’(테레오) 하라고 하셨다. ‘지키다’는 단어는 흔히 ‘순종하다’, ‘행하다’는 의미로 알려졌지만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교는 말로 전파하는 것은 물론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우리’ 곧 ‘교회’를 읽는다.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리스도’를 읽는다. 선교는 특별한 곳,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인 성도 개개인이 평범한 일상에서 바른 진리를 타협 없이 ‘보존하며 지켜내며’ 전수하는 것이 선교다.
마지막까지 그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1:5-7에서 우리의 믿음이 마지막까지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진짜 믿음으로 ‘보전되기’ 위해서 주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 “여러가지 시험을 당해 잠시 근심하게 됐으나” (6절) 라고 한다. 좀 더 나은 번역은 “만약 필요하면 혹은 꼭 필요했기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으나”(if necessary, you have been grieved by various trials)이다. 주께서 우리가 성경의 믿음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에, 필요하다면 여러 가지 시련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주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7절). 마지막까지 말씀을 ‘지켜내는 자’(테레오)가 복된 자이다.(계 1:3,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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