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묵상
주님의 통제 안으로 들어가는
자기통제의 상실
다른 누구보다 사역자인 나 자신이 절실하고, 깨어진 마음은 좀처럼 아물지 않아 줄줄 새고 있는 구멍들을 메울 수 없어, 그저 말씀과 기도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그 흐르는 물에 적셔져 있고 싶을 뿐이었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기에 기도했다. 그렇게 새벽에 홀로 기도하며 교우들과의 아침묵상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달라진 것이 있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이상하게도 불편한(?) 문제들이 불쑥 혹은 계속 찾아오고 있는 거다. 적어도 내가 떠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진 않더라도 문제들에 함몰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 당연지사이고, 대부분 원하는 것은 물 위에 배가 뜨는 것이지, 배 안에 물이 차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주 낯설은 방식으로 영혼을 다루신다.
도움이 필요할 수 있는 교우들로 인해 늘 밤낮으로 전화를 켜놓고 언제든 현장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살아왔음에도 지금처럼 내 자신조차도 힘겨운 시기에는 기도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내 작은 바람도 오로지 자신의 문제가 전부인 자의 간절하고 집요한 담대함 앞에서는 그 어떤 조건도 소용없게 된다. 물론 다른 이를 위한 사랑의 수고 자체가 곧 거룩이고 기도이다.
한 형제는 필리핀 현지에 편찮으신 부모님의 병원비와 여러 재정적인 필요를 감당할 수 없어 돈을 여기저기 빌렸는데 매달 월급이 이자로만 나가고 있다면서 거의 반쯤 죽은 얼굴로 새벽에 나와 목사에게 도와달라 다짜고짜 애원한다. 목사라고 도울 방도가 없으니 난 하나님께 울고, 회사 사장님을 수차례 찾아가 울며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자, 주님께서는 당장 자신도 빚에 시달려 파산 위기에 처한 사장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유산인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형제의 목돈을 해결해주셨다.
반면에 어떤 교우는 같은 재정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경우이기에 먼저 회사 사장님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회사도 파산위기라며 도울래야 도울 방법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해서 난감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게 일하신다. 그 교우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도대체 하루하루를 어떻게 생존할지 상상하기 힘든 삶을 살고 있는데 그에게 기도는 자신의 힘으로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벼랑에서 떨어진 자에게 더 이상 길이 없기에 구하는 간절함 자체다.
그럼에도 문제는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주님을 구하는 매일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교우는 고백한다. “저는 비록 빚에 시달리지만 하나님 앞에 제가 용서받은 죄의 빚이 가장 크고 셀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 고난을 제거해주시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크기를 알아가게 하심으로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자매가 있는데 주일 예배도 정기적으로 나오고, 아침 묵상 모임에도 한 번씩 나온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교회로 찾아와 개인기도 중인 목사에게 막무가내로 자신이 삶이 너무 악마같다면서 하소연하는게 아닌가. 자매의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필리핀 현지에서는 남편과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지만 한국에 홀로 와서 가정부로 일한 지가 벌써 오래다.
외로운 타국생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간을 남자들로 채우려했고 이미 주변에 알려진 낙인이 되었다. 자신의 비참한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자매를 위해 난 기도해주었다. 아직까지 눈에 보이는 다이내믹한 변화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가 지극히 미미한 겨자씨와 누룩처럼 퍼져가듯이 당장에 보이지 않지만 자매의 영혼 속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동일한 성령께서 보다 역동적으로 일하시리라 믿고 기도하고 있다.
사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예상치 않은 다른 문제들에 더 관여하게 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케케묵은 방 안 창문 커튼이 젖혀지면서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온갖 더러운 것들과 먼지들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앞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교우들의 문제보다 숨겨진 나의 죄가 발각됐다.
‘이것만큼은’ 이라고 하면서 움켜쥐며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내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과 자존심, 그 이면에는 결국 사역과 인생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집착, 그래서 결국 사역과 인생을 내 스스로 통제하고 조종하고 싶은 교활한 ‘위선’이 깔려 있었다. 나는 위선자였다. 진짜가 아닌 나를 나인 ‘척’ 연기(헬라어로 위선자는 ‘연기자’를 뜻함)를 하면서 어느새 무엇이 내 본분이고 정체성인지 잊고 살아가니 혼동과 좌절과 그리고 상실감이 더욱 컸던 거 같다.
물론 내 인생은 맡은 연기를 하는 것이라도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배역을 맡은 것이지 ‘작가’와 ’주연’은 내가 아니다. 내 인생은 내 자서전이 아니다. 태초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창조주의 “자리”를 원하여 자신을 하나님처럼 착각하며 사는 심각한 ‘위선 죄’의 증상이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 삶을 내가 통제하려는 것도 어렵지만(사실상 불가능하지만) 내 삶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내 삶의 통제권을 본래 주인이자 저자이신 주님께 넘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거 같다. 그것은 자기 통제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것은 내가 원하는 꿈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잃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인거 같다.
그런데 내 인생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지만 한편으로 자유해지는 길이다. 여전히 현실이 내 기대와 다름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고, 나는 내 삶의 저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내 인생의 가치는 내 자신을 위해서 만든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달린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인생은 나의 태어남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이신 하나님의 영원과 그분의 통제 속에서 그분의 더 거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근데 사실 내 인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일지라도 결국 모두 주님의 이야기의 일부일 뿐인데 내가 그분의 것이 됨으로 인해 그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니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의미를 찾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 대신에, 나란 존재가 이미 주님의 영원하고 좌절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무엇보다 계획보다 길이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도 없고 해결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신앙은 종착지가 아니라 여정이다.
앞으로 어떤 모양, 어떤 방향으로 주님께서 이끌어주실지 난 전혀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그 길, 도중에 그저 딱 주님이 인도하시고 보여주시는 만큼만 매순간 따라가고 싶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성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통제 속에서 가장 성부에게 의존적인 순종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아들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대로만 행할 뿐이다. 아들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요 5:19)
2023. 7.
마석에서 황호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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