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묵상
작고 조용한 삶으로의 야망
세상은 ‘크기’로 우리의 가치를 정의하려고 하지만, 결국 크기로 행복과 성공을 정의하는 세상과 우리 자신도 우주 전체와 역사 전체에 비하면 너무나 작다는 것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를 촬영하여 실제로 입증했다. 그의 유명한 글 “창백한 푸른 점”(우주에서 내려다 본 지구가 한 개의 점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말한다.
“저 점(지구)을 다시 보세요. 여기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집이에요. 그게 우리에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 당신이 들어본 모든 사람, 존재했던 모든 인간이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데올로기, 경제 교리들, 모든 영웅과 겁쟁이, 모든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민,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부부,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희망찬 아이,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 모든 부패한 정치인,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과 죄인은 그저 햇빛 속에 떠 있는 먼지 티끌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일치한다. 이사야 40:15, 22절은, ‘하나님 앞에서는 큰 나라라도 물통 속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고‘... ‘이 땅의 거민들도 메뚜기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존재가 우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작다. 그러므로 그 작은 세계에서 우리가 이룬 어떤 성취와 성공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작음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크심 때문이다. 이처럼 작은 우리를 가장 크신 하나님께서 너무나 생각하시고 염두 하시고 돌보시기에(시 8), 그리고 사랑의 크기를 측정하는 방식이 사랑 베푸는 자의 위대함에 달린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바빙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이다’라고까지 말했다. 하나님이 ‘유일’하시기에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의 가치는 유일하고 절대적이다. 또 그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등급이나 계급이 없기에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개개인의 가치는 높고 낮음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는 어찌 보면 ‘하나님만큼’ 영광스러운 자들이다!
전 우주와 전 역사라는 셀카봉으로 촬영하면 한 톨 먼지에 불과할 정도로 한없이 작은 우리지만, 죄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는 것 외에는 도저히 길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매우 큰 죄인이 또한 우리이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 유한히 작은 인간이 되신 성육신하심은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아질 만큼 자신의 크심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크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크신 하나님이 자신과 하나인 유일한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 더 줄 것이 없을 만큼,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큰 성공과 높은 자리라는 사다리에 올라가는 것으로 우리의 가치와 의미를 찾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크고 많아야’ 좋은 것이라는 세상의 정신을 거스르는 ‘콘트라 문덤’의 정신으로 오히려 작고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사랑하시고 섬기신 주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작고 평범한 우리를 쉼 없이 돌보시기에 작고 낮아 보이는 우리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또 그분의 시선이 향하는 작고 낮은 ‘곳’과 작고 낮은 ‘자들’에 대한 애정과 열망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비상하고 비범한 일들도 있지만, 어찌 보면 오히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이 더 많은 경우이지 않을까. 매일 일정하게 해가 뜨고 지게 하는 것, 계절과 시간을 변함없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움직이게 하는 것, 심지어 사소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들풀과 공중의 새에게 먹이를 주고 입히시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하겠는가!
시편 145편 15절이 말하듯이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바라보나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제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지극히 조용한 일상의 반복을 하나님은 결코 지루해하시거나 불평하시거나 중단하시지 않으시니 우리는 평범 속에서 주님의 비범한 인내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사소함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심오한 사랑에 놀라게 된다.
그 무엇보다 크신 우리 구주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실 뿐 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큰 자가 되고자 하면 너희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하시면서 낮아짐과 섬김이 우리를 위대함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이 아니라 섬김 자체가 “위대함”이라고 말씀하신다(마 20:26-28).
낮은 곳, 낮은 자들인 외국인 나그네들과 함께 한 지가 올해 20년이 되고 나니 간접적으로 주님께 불평이 왜 그리 많아졌는지. 나그네들과 함께 하는 20년 동안 안식년은 커녕 안식월도 못 보냈고, 매년 가족과 함께 하는 명절은 잊혀 진 채 수련회로 더 바쁘게 보내야 했고, 휴가도 마음 편히 가지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지칠 만도 하지만 왜 굳이 하나님께 불평을! 지극히 작은 나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망각해버렸다.
작은 나그네들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뒤로 한 채, 특별히 작은 자 장애아를 돌보는 것이 지치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런 작은 자들에 대한 수고를 빌미로 위대함은 아니더라도 어떤 모양으로든 보상을 원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목회자이며 선교사인 내 자신이야말로 정작 누구보다 가장 다루기 힘들고 변화되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이란!
과연 지나온 20년을 난 정작 ‘공정, 공평’이라는 잣대로 ‘보상’을 기대하며 사역을 해왔단 말인가. 나라는 존재가 보상이상으로 은혜로 고용된 일꾼이었다는 것을 잊은 채... 자격 없는 자를 보상 그 이상으로 20년을 자비로 대해주시고 사용하신 주님을 잊었다! 자녀를 아예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할 때에 첫째를 주셨고, 그것만도 분에 넘치는 은혜인데, 더해서 산모와 아기 모두 생사 위기에 있던 차가운 분만실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한 끝에 생명부지로 주신 아이를 장애아라고 이제 불평하다니. 게다가 20년 동안 사역자를 참아준 교우들의 인내는!
20년은 내가 버텨온 날들이 아니라, 20년 동안도 여전히 자리를 못 잡고, 여전히 약하고 넘어지는 나를 은혜로 쓰신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더 이상 힘이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자기 0%의 상태가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이고, 낮은 자리 그 곳이 주님께서 겪으신 자리였고, 그것이 마침내는 영광을 보는 번지점프같은 자리인데 말이다. 낮은 곳은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거기가 내 자리이고, 그 낮고 조용한 그 자리가 본디 야망을 가져야할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잊었다.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이 나의 목자이셨기에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여정에 평안하고 즐거운 길만이 아니라 눈물과 슬픔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셨지만 돌아보면 나의 고난, 삶 그리고 사역 뒤에서 늘 나를 집요하게 추격해오던 것은 ‘오직’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뿐이었다(시 23:6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랐다는 히브리어는 ‘오직 only’의 의미도 있다!).
20년 동안 주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셨기에 나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주님께서 쉬지 않으셨기에 나는 쉴 수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시는 주님이시기에 내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선하신 그 분 앞에 항상 놓여 있음으로 내가 복됨을 잊었다. 진짜 문제는 거대한 세상에서 내 스스로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자신을 너무 크게 만들고, 하나님을 너무 작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 자신을 크게 만들 때 나는 스스로를 나 자신만의 구원자로 만든다. 그러면 주님은 내가 필요한 분이시고 나를 의존하시는 분인 것처럼 만든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내게 빚진 자가 되고, 그분이 빚졌다고 생각할 때 그분이 주시는 은혜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니 당연한 몫을 받지 못한다고 여길 때 불평을 하게 된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아비와 늘 함께 있었고 아비의 것이 이미 다 내 것임에도 이미 마음에서부터 길을 잃었던 첫째 아들과 같은 나를 주님이 찾아내신 거 같다. 한편으로 나는 주님의 양이다. 나는 비뚤어지고 어리석고 종종 길을 잃지만 사랑에 빠진 주님은 내가 전혀 필요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재와 길 잃음을 참지 못하시고 찾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집요하게 결국 찾아내시는 사랑스런 목자이시다. 가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잃은 양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되찾는 것이 오히려 그분에게 큰 기쁨이 된다면 나의 돌이킴도 하늘에서 잔치할 기쁨의 핑계가 되었으면!
다시 작고 조용한 일상과 사역에 열망을 가지고 싶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할 방식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인 ‘거룩한 삶’을 말하면서 ‘형제사랑’을 언급한 뒤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사는 것을 야망으로 삼으라(”to 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라.”(살전 4:11)고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 받고 사랑으로 성화를 이루어간다.
거룩은 사랑으로 구현되고 그 사랑은 작고 조용한 일상에서 나타나야한다. 현재의 작고 사소한 일상에서 형제 사랑, 이웃사랑을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야망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냉수 한 컵을 대접하듯이 매우 작고 평범한 일에서 시작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미미한 섬김일지라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마 10:42 “누구든지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복된 약속을 하신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겸손히 종처럼 너희를 섬겼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이제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17절). 쉐퍼가 말했듯이 결국 우리들은 누구의 ‘나’, 그 무엇의 ‘나’도 아닌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고 명하시는 그분의 ‘나’가 될 때 더 이상 작은 자(No little people)도 작은 곳들(No little places)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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