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늦은 여름 묵상
“기다림(Waiting)은 낭비(Waste)가 아니다!”
한 번이라도 교회에 흔적을 남기고 어떤 연유든 떠난 이들을 잊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사역자의 마음인데 막상 기도가 현실이 되어 수년 동안 떠난 이들이 교회에 찾아올 때면 당황스러운 기쁨으로 놀래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미소가 절로 나는 요즘이다. 수련회를 통해서 은혜를 경험하고 교회를 꾸준히 나왔음에도 점차 교회에서 멀어지다 떠난 자매가 돌아온 것이 꿈같다. 알고 보니 남편의 빚 문제로 주말에도 빠듯하게 일을 해야 해서 교회를 나오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친다. 남편의 사업으로 인해 비슷한 재정 문제로 그동안 힘들었다며 때문에 집까지 전라도로 옮겨져 교회를 올 수 없었다고 못 다한 말을 눈물로 쏟아놓는 자매. 오랜 기간 교회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루머만을 남긴 채 떠났다가 찾아와 목사에게 선물을 건네고는 다시 기약 없이 떠나는 자매도 있다. 교회 공동체에 융화되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어떤 영문에서인지 다시 찾아온 사연 많은 부부 등등.
기도는 변치 않는 주님의 ‘뜻’을 바꾸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뜻을 이루기 위해 정하신 ‘수단’이고, 바꿀 수 없는 뜻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기도를 통해 바꿀 수 있으시기에, 그리고 기도는 무엇보다 구원하시는 능력이 주님께만 달려있음을 신뢰하는 기다림이기에, 떠난 이들의 돌아옴은 기도를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기도를 사용하시어 중단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사역자에게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으니 더욱더 주의 일에 힘쓰라’(고전 15)는 격려와 함께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주 앞에서 범하지 않아야 함’(삼상 12)을 주님께서 상기시켜주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떠난 탕자만이 아니라 아비와 살던 첫째가 마음으로는 이미 오래 떠나있었듯이, 교회 안에 있어도 여전히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제목이다. 옥상 낙상으로 고관절이 부서져서 수술과 간병으로 교회에 큰 사랑을 받았었고 또 최근 오토바이 사고로 손가락 골절을 위한 수술을 어렵게 예약 한 후 기도하며 기다리는 중에 자의적으로 수술을 취소한 조코형제. 혈압, 간수치, 요산수치가 매우 높아 불안한 모습이 역력해 복음을 나누며 치료를 도왔는데 약으로 상태가 완화됨을 느끼자 분위기가 달라진 아르빈 형제. 코로나감염과 맹장파열로 고통하던 중 수술을 돕고, 모친 병원비를 위해 회사에 사정을 하고 장례까지 도와주었지만 아직은 예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리또형제.
이들도 안타깝지만 또 다른 이들이 있다. 상대적 혹은 절대적 빈곤 속에 살던 이들이 한국에 와서 소비자본주의의 맛보고 나서 스트레스와 공허함을 풀 수 있는 탈출구를 잘못 찾아 결국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경우들이 요사이 적지 않다. 착하고 순진한 이들이 더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마치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이 전체를 탁하게 만드는 것과 같고, ‘처음 한 번’에 망가지고, 결국 계속 ‘한 방’을 노리게 되어 중독에 빠진다. 도박, 술, 이성에 빠져 사채로 어마한 빚에 시달리며 바닥을 치며 사는 이들. 그래서 이제는 단순히 고난과 은혜의 경험이 비례할 수 있다는 순진한 기대를 접고 교활한 배후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더 본질이라는 것, 그리고 늘 문제의 핵심(heart of problem)은 마음(heart), 영혼의 문제이기에 그들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예수님이심을(행 9:34) 절실히 고백하게 된다. 때문에 나는 이주민 사역이 해외 사역보다 저투자 고효율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한 ‘인력’이 아니고 같은 ‘인간’이고 같은 ‘죄인’이다!
가구공장에서 사포질로 늘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대가로 인후통, 기침이 심해진 제니퍼 자매를 데리고 병원 진료 후 담소는 내게 소망을 주었다. 자주 소개되었지만 자신이 어릴 적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살다 동료들에게 살해된 아빠로 인해 충격을 받은 가족, 덕분에 과부가 되어 홀로 자녀들을 키우느라 억척스럽게 사신 엄마의 모습이 늘 생생하다는 거다. 그런데 첫째 딸인 자신이 커서 아빠처럼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그리고 아빠 일했던 마석에 왔는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 돈을 벌면 행복해질 줄 알고 온갖 고생한 엄마가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최고의 복임을 딸인 자신이 나눈 복음을 통해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 토요일마다 엄마와 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나누고 있다면서 작년에 자신의 삼촌(게이로 살았던)의 장례식 때 내가 온라인으로 해외까지 흩어진 가족들에게 설교한 것이 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이 들려진 것이라며 가족들이 너무나 기뻤다는 것이다.
듣고 생각해보니 타국에서 사랑하는 아빠를 상실했어야 했던 아픔이 치유된 것, 남편을 잃고 오로지 돈이 가정을 살린다 믿고 산전수전을 겪은 서러운 과부가 결국 돈이 아니라 예수가 최고의 복임을 깨닫게 된 것, 가족들에게 나누고픈 최고의 선물이 복음이라는 고백이 가능해진 것은 제니퍼자매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이 내리셔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고넬료 가정이 베드로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는 것을 듣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으로 이끄는 회개를 주셨다!”(행 11:18)는 고백 그대로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나그네이자 이방인인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성령’이 내리시어, 죄로 죽어 죄에 무감각한 영혼을 되살려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온갖 문제(질병, 중독)로 소망 없는 이방인으로 보일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듣는 중에 ‘성령’이 내리시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은혜’를 주셨다”는 고백이 터져 나올 것을 기다리며 기도해야겠다. 한편으로 복음의 말씀을 듣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이 “주께서 당신(베드로)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in the presence of God) 있습니다.”(행 10:33)라는 고백은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현장이 다름 아닌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이고, 영혼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우는 것이기에 설교자로서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기쁨에 찬 두려움이 크게 다가온다.
납득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차별과 편애가 없으신 분”이심(행 10:34)을 깨우치도록 신학적 회심을 의도하신 것은 오늘날의 교회, 주빌리교회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이들, 어떤 부류에 대해서 변화되기 어렵다 혹은 함께 하기 어렵다고 제단하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린 모든 담을 다시 세우고 있는 격이다. 한국교회가 한창 전도와 선교의 부흥기를 경험할 때 아이러니하게 장애인들이 교회 밖으로 내몰리고 지금도 그들을 선교의 대상 혹은 함께 할 성도로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와 사역자들을 향해 주님은 “나는 구원하는데 있어 차별과 편애가 없는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신학적인 회심을 요구하실 것이다. 부정한 이방인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3번씩이나 반복하심은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이시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는 음성으로 들린다.
하나님이 편애하셨기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실 만하셨다고 할 자가 누가 있을까. 오히려 편견과 편애가 없으시기에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지금의 나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쓰심’과 ‘천히 쓰심’의 그릇으로서의 선택도 모두 같은 미천한 ‘진흙’ 중에서의 선택이시다(롬 9). 우리 모두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소망없던 나그네들이었다(엡 2). 자신은 하나님께 택함받을 자격이 있고, 타인에 대해 자격없다며 배척하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혹자의 말대로 천국은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의 곳이고, 지옥은 자신이 천국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의 곳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오랜 기다림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들로 때로 판단하고 지쳐하던 나에게 새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으로의 신학적 회심을 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편견, 편애, 조건없이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에게 나올 수 있는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충분하다. 누구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내게 나올 수 있다. 나에게 나오는 자는 내게 나오기 위해서 다른 어떤 이가 될 필요도 다른 조건도 필요 없다.” 내 조건이 그분이 날 사랑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분이 먼저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이 나를 그분의 눈에 사랑스럽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고, 그러니 내 조건이나 상태 때문에 그분이 나를 버리시지 않으시듯이 그분께서는 그분께서 택하신 나그네들에 대해서도 그리하실 것이다. 그러니 편견과 편애없이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니라 보장된 “예견된 기다림”이다.
‘기다림’을 묵상하다가 이사야 40장 말씀을 교우들과 나눈 적이 있다. 익숙해진다고는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들의 통제가 어려운 행동으로 인해 공공장소도 자유로이 가지 못하는 어려운 현실을 보며 “우리가족은 조용한 낭만은 없지만 시끄러운 즐거움은 있다!”는 위로도 효과가 없을 때가 있다. 수년을 치료를 받으며 기도하며 기다림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별로 없어 보이는 유위, 기도하며 유수한 병원을 찾아다녔음에도 대안은커녕 기약까지 없어져버린 겸비의 무릎을 위해 얼마나 기도해왔는가.
기다림이 길어지고 특히 고난 속에서 기다림이 길어지면 하나님도 잊으셨다고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오랜 유배 생활로 지치고 국가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고통에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으신 건 아닌지, 과연 상황이 나아질 희망은 있는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져 있고 내 권리는 하나님이 무시하신다.”(27절) 불평한다. 그 때 이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상기시킨 후 새로운 힘을 약속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듣지 못했느냐? 여호와는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땅끝을 창조한 분이시다. 그분은 지치거나 피곤해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찰력은 아무도 탐구할 수 없다. 그분은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신다. 젊은이라도 지쳐 피곤하고 장정이라도 걸려 비틀거리겠지만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서 솟구치듯 올라갈 것이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28-31절).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자신의 백성들에게 계속 새 힘을 주실 수 있다는 약속을 주시는데 조건은 또 “기다림”이다. 기다림에 지친 이들에게 지치지 않는 새 힘의 약속은 ‘하나님을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비록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것들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따라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시라는 것. 우리는 현실이 우리의 눈으로 보여야 그게 현실이라고 믿지만, 성경은 반대다.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먼저이고 “빛”이라는 현실이 그분의 말씀에 뒤따라온다. 그분의 말씀이 먼저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현실이 발생한다. 그분이 약속하신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약속을 지키기에 충분히 강하시고 지치지 않으신다. 그분의 지식과 이해하심이 측량할수 없기에 그분은 우리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전능하신 지혜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리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힘이 새로워질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서 솟구치듯 올라갈 것이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31절). 우리는 가끔은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듯 하지만 항상 그럴 순 없다. 우리는 달려갈 듯이 힘을 쓰지만 항상 그럴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걸을 수 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릴 때 그분은 우리가 계속 걸어갈 수는 있게 하신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즉시 죽음에서 일으키실 수 있으셨음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의 신성한 계획에 따라서 성자께서도 어둠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셔야 하셨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않는 세월이 헛된 세월일 뿐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헛된 날들을 보내게 하셨으며..”(시편 78:32–33)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일하신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림을 낭비하지 말자. “예로부터 주님, 당신 외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서 이런 일을 행한 신을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이사야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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