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희년공동체/희년국제선교교회

묵상 - 지옥 같은 거짓사랑을 벗어나 실체의 사랑으로 (2024. 3월)

희년선교회 2024. 4. 10. 20:27

 

“지옥 같은 거짓사랑을 벗어나 실체의 사랑으로” 

 

C.S. 루이스는 “천국을 제외하고 사랑의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장소는 지옥뿐이다.”라고 말했다. 진짜 사랑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을 길이 있나? 사랑하면서 어떻게 불편함을 피할 수 있나? 대가없는 사랑? 그것은 ‘지옥 같이 안전한 거짓사랑’일 것이다. 사랑하는 방식을 그다지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사랑을 해보려니 어색하다. 그런데 교우들을 사랑하라고 부름 받은 교회의 목회자이고, 아내와 자녀를 사랑해야하는 남편이자 아빠인 내가 그 부자연스러운 사랑을 하려니 어떨 때는 당황스럽다. 사랑은 어렵고 진흙탕 그 자체다.

 

사역자로 부름 받았기에 죄가 아닌 이상 교우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 가족의 문제와 안위보다 교우들의 필요를 우선으로 했고,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든 사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족이 아파도 교우가 아프면 먼저 달려가 돌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사역자의 진심을 알아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경험하고 회심하는 것이 사역자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전혀 다른 낯빛과 태도로 변할 때는 용감했던 사랑이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신중함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사실 그들 이면에는 마음의 문제, 영적인 문제가 더 근원적인데, 죄의 민낯을 아예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등지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야말로 사역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근심이 된다. 자타가 모두 알고 있는 심각한 죄에 빠져있는 교우를 찾아가 죄에서 돌이키도록 사랑 안에서 진실을 전하여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거듭되는 권면에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그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전이 된 신자가 간음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연합된 그리스도로 하여금 창녀에게 입맞추게 하는 끔찍한 죄라고 지적하자 눈물로 뉘우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올바로 바뀌지 않는 한 후회의 눈물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죄를 여전히 사랑하는 한 돌이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죄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것은 죄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실토한 바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방식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돈을 사랑하는 것에 빠지면 주님을 미워하게 되고 그것은 돈이 주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우리 마음의 주인이고,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이 결국 주님을 미워하고 등지게 만든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싶어서,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하는 게 문제다. 하나님과 대등하게 사랑하는 ‘동시’ 사랑은 이미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더 기울어진 상태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자체가 결국 하나님에게서 마음으로 이미 떠난 상태이고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그것은 한 집에 몸으로는 아비와 함께 살았어도, 아비보다 돈을 더 사랑함으로 집 떠나기 전부터 이미 ‘마음’에서 아비를 떠나 길을 잃은 탕자의 모습이고, 주님보다 죄를 더 사랑함으로 길 잃은 영혼의 모습이다. 

 

이런 죄인을 사랑하는 아비가 주님의 사랑의 투영인거 같다. 매번 아쉬울 게 전혀 없으신 쪽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심하고 그 사랑의 언약(약속) 안에 자신을 스스로 매이시고, 그것은 마치 아비를 등진 탕자를 계속 기다리는 사랑과 같고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사 65:2)와 같다. 

 

길 잃은 교우를 위해 기도하고, 계속 권면하면서 탕자의 아비를 떠올리며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된다. 비록 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아비를 떠났음에도 아비의 마음은 그를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계속 기다렸던 아비는 아들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먼저 알아차리고 그를 찾았고 달려갔다. 고대 근동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 지긋한 아비가 체면과 품위를 버리고, 마치 달리기 경주하듯이(실제 ‘달리다’는 헬라어 단어가 경쟁적인 경주 달리기를 의미함) 간 것은 혹자가 말하듯이 행여나 아비를 등진 낙인찍힌 아들을 누구라도 먼저 발견해서 수치를 당치 않도록 아들의 굴욕을 덮기 위한 아비의 염려어린 사랑의 굴욕일 것이다.  

 

아비는 미리 준비한 아들의 회개 리허설이 나올 틈도 주지 않은 채, 와락 껴안고 입맞춤을 한다. 돼지우리에서 뒹군 냄새나는 아들을 진흙투성이 그대로 안아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충분한 회개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먼저 달려와 입맞춤해주시는 사랑이다. 죄와 죄책감으로 엉망진창 상태의 우리를 있는 그대로 감싸 안아주는 사랑이다. 아비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디서 대체 무엇을 했는지 그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대는 아들이 회개했거나 더 잘하겠다는 맹세에 달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조건없는 입맞춤과 안아줌이 아들로 하여금 회개의 고백을 만든다.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앞지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회개하게 만든다!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빚진 마음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어서 빚을 갚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는 무엇 하나 드릴 것이 없었고, 여전히 채워져야하는 필요들만 넘쳐나는 빈궁한 자일뿐이었다. 그는 의식주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용서가 절실한 자였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빚을 지고 있음에도 그분께 되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다. 죄인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자 예수님이 오셨어야만 하는 이유 ‘죄’ 뿐이다. 그것이 우리 죄인이 하나님께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아비는 잔치를 베푼다. 아비는 이 잔치가 ‘마땅’하다고 말을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를 잃었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아비에게는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는 합당한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들이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세상이 너무 커서 그것을 포용하는데 ‘많은 사랑’이 필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이 너무나 나쁘고 악해서 그것을 사랑하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필요했고, 그래서 유일한 아들을 죽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을 정도로 악한 우리를 사랑하신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을 말한다. 

 

도저히 가망성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대가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실체를 보여주신다. 사랑하는 교우들을 통해서, 그리고 아들 유위를 통해서 나는 그 사랑을 조금씩 배워간다. 

 

변화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교우들, 아예 영구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과 같다. 마치 영원 전부터 단절됨 없이 영원하고도 고유한 사랑을 나누셨던 성부와 성자께서 이전에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사랑의 단절을 경험하셔야했고, 영원히 하나님이시기만 했던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고, 죽음이후에도 전혀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지금도 살아계신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가지신 사랑이다.  

 

요즘 겸비와 함께 도스또엡스끼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고 있는데 도스또엡스끼에게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다. 석영중 교수의 해설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도스또엡스끼의 사랑은 공상이 아니라 실천이고 그것은 행동으로, 전 존재로 다하는 것이며 평생 동안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에 무척 어려운 중노동과 같다. 이 사랑은 정말 다른 수준의 것인데, 나를 끊임없이 희생하고 나를 완전히 버리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인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종국에 가서는 나를 버리는 사랑은 나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된다. 그 회복은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아들이지만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평범한 여행은커녕, 평범한 대중교통과 공공장소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게 슬플 수 있다. 한 성도의 좀처럼 변하지 않는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게 의미 없이 허비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의 소리를 음소거하고 진흙탕 같은 실체를 배제하는 공상적인 사랑 말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상처받고 허비되고, 그리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랑, 그 사랑이 결국 사랑의 본체이시고 참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나를 회복하는 길임을 배우는 중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하면, 베드로를 떠올린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였음에도 주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 철저히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신 주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비통하게 울어야만 했던 사람.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천사를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가장 먼저 들어야했고 유일하게 언급했던 제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실패자와 같았던 “베드로”(막16:7)였다. 

 

가룟 유다와 달리 베드로가 믿음에 실패하지 않고 온전히 회개하여 돌이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미리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그리스도의 앞선 사랑과 실패 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미리 원하시고 정하시면 그분의 은혜를 능가할 수 있을 정도로 돌이키지 못할 비참한 죄인은 없다. 주님의 선제적인 사랑이 가망성 없던 나를 설복하시고 압도하고야 말았다.  그 주님의 선제적인 사랑과 죽음의 대가까지 기꺼이 지불하신 사랑이 대가없이 사랑하려는 지옥같은 사랑을 넘어 자기죽음으로서만 다다를 수 있는 부활의 사랑, 천국의 사랑으로 이끄시리라 믿는다.

 

아래 곡은 요즘 교우들과 자주 듣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곡으로 유명한 존 뉴턴이 만든 곡인데 남겨봅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곡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0e8a53E5Is

"Prayer Answered by Crosses" 

- By John Newton
I asked the Lord that I might grow
In faith and love and every grace,
Might more of his salvation know,
And seek more earnestly his face.ᅠ
'Twas he who taught me thus to pray;
And he, I trust, has answered prayer;
But it has been in such a way
As almost drove me to despair.
I hoped that, in some favored hour,
At once he'd answer my request,
And by his love's constraining power
Subdue my sins, and give me rest.
Instead of this, he made me feel
The hidden evils of my heart,
And let the angry powers of hell
Assault my soul in every part.
Yea,more, with his own hand he seemed
Intent to aggravate my woe,
Crossed all the fair designs I schemed,
Humbled my heart, and laid me low.
"Lord, why is this?" I trembling cried;
"Wilt thou pursue Thy worm to death? "
"This in this way", the Lord replied
"I answer prayer for grace and faith."
These inward trials I employ
From self and pride to set thee free,
And break thy schemes of earthly joy,
That thou may'st find thy all in me. 
십자가로 응답된 기도 
- 존 뉴턴 -
나는 주님께 구했네
믿음과 사랑과 모든 은혜에서 자라게 해 달라고,
주님의 구원을 더욱 알게 해 달라고,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해 달라고.
그분이 나에게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기도에 응답하셨으리라 믿네
하지만 그것은 이런 식으로 응답되었고,
거의 나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네.
나는 어떤 은총의 시간에
주님이 즉시 나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랐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억제력으로
나의 죄를 진압하고, 내게 안식을 주시기를 바랐네.
그러나 그 대신에 주님은
마음 속에 감추어진 죄를 느끼게 하셨네.
그리고 지옥의 성난세력이
내 영혼의 전부를 공격하도록 하셨네.
그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의 손으로
나의 비통함을 더 깊게 하시느라 애쓰셨네.
내가 세운 모든 홀룡한 계획을 방해하셨고,
나의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셨으며 나를 쓰러뜨리셨네.
나는 떨면서 울부짖었네.
"주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세요?"
"벌레 같은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주님은 대답하셨네.
"바로 이것이 은혜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나의 응답이니라."
"이 내적 시련들을 사용해서
나는 너를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한다.
그리고 지상의 기쁨을 위한 너의 계획들을 무산시켜

네가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