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희년공동체/본부-버마 공동체(2016-2024)

미얀마 버마 공동체 사역을 되돌아보며 (2024. 5월)

희년선교회 2024. 5. 24. 22:37

[2024-05]

희년선교회 버마 공동체 사역을 되돌아보며

Grace Myanmar Community -

 

 

이헌용

 

국내 체류 미얀마인 중 버마족을 대상으로 하던, 버마 공동체 사역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담당하던 민뚜 목사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후임 사역자를 구하지 못해 사역을 잠시 중단키로 하였습니다. 지난 8년간의 버마 공동체 사역을 되돌아보며 소식 드립니다.

 

 

1. 국내 미얀마인 현황

 

미얀마는 여러 부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입니다. 135 개의 소수 부족들은 과거 영국 통치하에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가 이뤄졌지만 주 종족인 버마족은 불교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며 지금까지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 있습니다.

 

미얀마 버마족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미얀마를 식민 지배했던 서구가 전파한 외래종교이며 미개하고 열등한 소수 민족들이나 받아들이는 종교로 여겨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화된 소수 민족들은 자치권과 독립을 위해 오랜 세월 버마족과 갈등해 온 역사가 기독교를 더 경원시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소수민족 교회는 버마족 선교에 대한 어려움을 자기 손을 호랑이 입 속에 넣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소수민족 교회들이 버마족 선교에 대해 한편 소극적인 이유에는 오랜 세월 군부로부터 당한 폭력과 기득권층인 버마족들로부터 받은 차별로 인한 요인도 있습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버마족 노동자, 유학생들도 그 연속성 상에 있습니다. 비록 한국이라는 타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접촉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에는 약 46,000 여명의 미얀마인들이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 중 30,000여명은 고용허가제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고 나머지는 유학생과 난민신청자들입니다. 이들 중 기독교 소수민족들은 한국에서도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미얀마 소수 민족들의 공동체(교회)30여 개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 나누며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노동자로서 6일간 힘들게 일하고 하루 쉬는 날 예배드리러 먼 길 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참 귀한 신앙입니다. 한가지 부족한 점을 말하자면, 소수민족 교회들은 버마족들과 철저히 분리된 채 그들끼리만 친목을 도모한다는 점입니다. 미얀마 현지 뿐 아니라 한국내 소수민족 기독 공동체들이 풀어가야 할 선교적 과제입니다.

 

 

 

2. 국내 버마 공동체의 태동

 

버마 공동체는 2014년 한국선교회(대표 남양규 목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ACTS)의 이한영 교수는 동 신대원 Th.M 과정에 있던 민뚜 목사에게 국내 미얀마 버마족 선교사역을 제안하였고 민뚜 목사는 이한영 교수가 이사로 섬기고 있는 한국선교회에 소속되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한영 교수는 미국교회의 한 후원자를 연결하여 버마 공동체를 지원해 왔는데 후원 약정 기간이 끝나고 새 후원자를 구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서울영동교회(정현구 목사)가 후원교회로 나섰고 한국선교회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지원하던 버마 공동체 사역을 희년선교회에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3. 희년선교회의 버마 공동체 사역

 

 

(용산에서의 초기 모임)

 

미얀마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던 19세기, 버마족들은 복음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대신 소수 민족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버마족인 민뚜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동족 버마족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민뚜 목사가 버마족이지만 강력한 소승불교도들인 버마족 노동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조차 쉽지 않은 과제이었는데 모임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계기는 한국어 교육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사로서 헌신적으로 섬기기 시작한 버마족 카잉와 자매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 자매의 헌신

 

 

 

미얀마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후 한국에 와서 상담학을 공부하던 카잉와 자매는 버마 공동체의 첫 열매였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며 공동체 멤버들의 한국어 실력 향상을 위해 매 주일 4시간 이상 한국어를 가르쳐왔습니다. 이 자매의 헌신으로 인해 미얀마 불교도 청년들이 버마 공동체로 몰려왔고 자연스레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카잉와 자매는 학업을 마치고 미얀마로 귀국하였고 그곳에서 한국어 학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예전처럼 공동체 내에서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섬겨왔습니다.

 

카잉와 자매 외에는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본국으로 귀국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회원들은 여전히 공동체 내에서 유대관계는 깊지만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한국어 교육을 통해 새로이 모집한 회원들도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있으며 공동체를 좋아하여 서로의 유대 관계가 깊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2년 사역 중에서)

 

주일이 되면 버마족 청년 노동자들이 아침 일찍 제법 먼 곳으로부터 공동체를 찾아왔습니다. 몇 명은 토요일 저녁에 올라와 숙식을 함께 하며 교제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사역 초기, 한국어 수업은 수준별로 오전 오후 각각 2시간씩 진행하는 강행군이었는데 오전과 오후 한국어 수업 사이에 점심 식사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동체를 빚어가며

 

 

 

민뚜 목사는 모이기 시작한 버마족 청년들을 규합하여 공동체를 이루어갔습니다. 주일 오전 한국어 수업을 마치고 점심식사 후 찬양과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한 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청년들은 아직 믿음을 갖진 않았지만 마음이 열려 민뚜 목사가 진행하는 모든 과정을 기쁘게 따라와 주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어 교육을 받는 버마족 청년 노동자들도 수준별 한국어 교육 단계를 마치고 교체됨에 따라 복음을 듣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남이섬 소풍)

 

 

미얀마인의 축제, 띤잔

 

미얀마 띤잔 축제 행사에 부스를 열고 참여한 버마 공동체 (2018. 4. 22)

 

미얀마인들은 매년 4월에 띤잔이라는 명절 행사를 갖습니다. 서로에게 물을 뿌려가며 축복하는 명절입니다.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미얀마 노동자들도 이 때가 되면 부천의 한 운동장에 천여 명 이상이 모여 공동체별로, 그룹별로 만들어 갖고 온 음식을 서로서로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특이한 점은 국내 미얀마 교회 공동체들은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미얀마 전통 행사에 참여하여 비기독교인 공동체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다만 우리 버마 공동체만 해마다 꾸준히 참석하여 다른 공동체들과 음식을 나누고 전도도 하며 관계를 형성하려 했던 노력이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군부 쿠데타, 그리고 민주화 운동

 

20212월 미얀마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내 미얀마 노동자들은 큰 혼란과 격동에 빠졌습니다. 미얀마 온 국민이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에 나섰던 것처럼 국내 미얀마 노동자들도 매 주일마다 민주화를 위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버마 공동체 멤버들도 한국어 공부보다는 거리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사역도 침체되어 이전처럼 모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민뚜 목사 자신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그도 군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컸는데 얼마나 깊이 참여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때 희년선교회가 설립한 사단법인 국제민간교류협회는 미얀마 민주화운동 사상자 돕기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민주화 운동 중 사망하거나 총상은 입은 시민들의 가정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위로금을 전달하는 일을 계획하여 이 일을 담당할 현지 사람을 구하는 일 일부를 민뚜 목사가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가정을 방문하여 현금을 전달하고 증명 사진을 찍어 오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오고 가는 길에 혹시라도 군인에게 검문 당해 핸드폰을 조사받는다면 감옥에 갈 뿐 아니라 목숨이 위험한 일이었지만 시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여 여러 목회자들과 기독인들이 이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사랑의 나눔헌금을 전달하며)

 

버마 교회와 소수민족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미얀마의 소수 부족과 버마족은 오랜 세월 서로 갈등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그동안 군부가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해 온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얀마내 소수민족 교회와 버마 교회도 서로 마음을 열어 교류하지 못해 왔습니다. 군부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한국에 근로자로 체류하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소수 부족인 미조 공동체(KMC)와 다수 종족인 버마 공동체(GMC) 리더가 복음 안에서 교류하고자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할렐루야! 두 공동체가 주 안의 형제로서 미얀마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입국, 그리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이렇게 3년이 지나는 동안 민뚜 목사에게도 마음의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민뚜 목사의 아내 니니리와 두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군부와 지역 PDF(시민방위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마궤 주 강고 지역입니다. 마을은 테러리스트 군인들에 의해 봉쇄되어 매일 마을 근처에서 총소리와 폭탄 폭발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주민 모두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지내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가족들은 불의한 군부 쿠데타에 대한 시민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군부에 장악당한 학교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운동에 동참해왔는데 아이들이 3년이나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집에 머물러 있는 상황은 부모로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희년선교회와 의논하여 일단 부인과 두 자녀를 한국에 불러들이기로 하여 202210월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인천공항에서 해후한 가족들)

 

부인 니니리 자매와 두 자녀가 한국에 입국하였지만 적응하는 문제가 컸습니다. 아이들 한국어 적응은 SG Korea (대표 이남희)의 큰 도움을 받아 어린 두 자녀의 한국어는 놀랍게 발전하여 부평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닐 수 있었습니다.

 

(SG Korea에서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수업)

 

또 한가지 문제는, 가족들이 모두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기 시작했지만 민뚜 목사 혼자 생활하기에도 빠듯했던 생활비로는 네 가족이 살기는 불가능하였고 희년선교회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지만 부인은 공장에 아르바이트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한국에서의 정착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가는 길을 추진하였습니다. 다행히 부인과 두 자녀에게 비자가 나와 202311월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민뚜 목사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미국 비자가 갑작스럽게 나왔습니다. , 2주 안에 미국에 입국해야하는 비자유효기간 제한으로 인해 금년 2월 말 인사도 제대로 못드리고 급히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역을 잠시 멈추며

 

민뚜 목사와 버마 공동체 사역을 어언 8년이라는 기간을 함께 해왔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 가족들이 미얀마에서 겪었을 고난과 쉽지 않았던 한국 생활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 버마족을 향해, 미얀마를 향해 함께 힘써 뿌리고 심고 물 주었던 모든 것이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와 그 가정을 축복하며 전송하였습니다.

 

희년선교회는 버마 공동체 후임 사역자를 구하지 못하고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안타깝지만 공동체 사역을 잠시 멈추기로 하였습니다. 돌이켜 볼 때 이렇게 힘써 8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해 왔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딱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더 힘써 복음을 전하고 더 힘써 기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매사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왔는지 자문해봅니다.

 

공동체를 거쳐간 많은 청년들에게 들려진 하나님 말씀이 심령 가운데 살아나 주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동안 지원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기도 제목 :

 

1. 버마 공동체를 통해 그동안 복음을 들은 많은 버마족 청년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버마 공동체 사역을 잠시 멈추지만 한국내 많은 버마족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할 사역자를 보내 주시어 다시금 새롭게 공동체를 일으켜 주소서.

 

2. 미얀마 군부의 악함을 주께서 물리쳐 주사 속히 전쟁이 멈추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멈춘 뒤 그동안 군부에 고통당했던 많은 시민들, 소수민족들이 복수의 총, 보복의 칼을 들지 않게 하시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3. 먼저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미얀마 소수민족교회들이 버마족들을 향해 샬롬(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대장을 따라 자기 희생의 길을 담대히 가게 하소서.

 

4. 그동안 후원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영동교회, 산오름교회, 서울중앙교회, 샬롬교회, 아시안미션)

 

 

 

참고 1. 버마 공동체 약력

 

2014. 한국선교회에 의해 버마 공동체가 용산에서 시작됨

2016. 한국선교회는 희년선교회와 협력하여 버마 공동체를 공동운영키로 함

2017. 11 한국선교회는 버마 공동체 사역을 희년선교회로 이관하기로 함

2018. 9 용산 재개발 계획에 따라 모임 장소를 신도림역 인근으로 옮김

2020. 11 모임 장소를 부평역 인근으로 옮김

2022. 11 임대계약 만료로 인해 모임 장소를 부평역 인근 다른 곳으로 옮김

2022. 9 민뚜 목사의 부인 니니리와 두 자녀가 한국에 입국함

2023. 4 모임 장소를 부평역 인근으로 옮김 (현대더로프트 101527)

2023. 10 민뚜 목사의 부인 니니리와 두 자녀가 미국으로 출국함

2024. 2 민뚜 목사가 미국으로 출국함

2024. 3 버마 공동체 사역을 일시 중단하기로 함

2024. 4 버마 공동체 모임 장소 폐쇄

 

 

 

참고 2. 부인 니니리와 두 자녀의 미얀마 탈출기

 

미얀마 강가우에서 한국으로

 

 

강가우 는 미얀마 마궤-(Division)의 강가우-지구(District)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수도인 친(Chin) 자치주(State)와 가깝습니다. 20212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매우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와 두 딸도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쿠데타 이후 테러군에 맞서 싸우는 시민방위군(CDF-Civilian Defence Forces)인 친 방위군이 결성되면서 친 주와 강가우 인근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시민방위군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테러리스트 군대와 싸우기 위해 미얀마 전역에서 지역별 민중방위군(PDF-People Defence Forces)이 결성되었습니다. 그 중 민중방위군의 대부분은 마궤-도 및 사가잉-도에 있습니다.

 

 

강가우 마을은 거의 매일 전투가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민중방위군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테러리스트 군대의 군인들은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공포에 휩싸인 동네 젊은 남녀들은 집과 노인들만 남겨놓은 채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테러리스트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 중 민중방위군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면 바로 사살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강가우 마을에서의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고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거의 매일, 총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쿠데타 이후로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1년을 포함하면 벌써 3년째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두 아이들(물론 이 곳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만)은 미래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 양곤이나 만달레이와 같은 대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대도시에 집이 없기 때문에 강가우 마을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항상 하나님께 내 아이들의 교육과 그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를 강가우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이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오라고 초청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뜻밖에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즉시 양곤으로 갈 준비를 하고 우리 가족 셋의 버스표를 예매했습니다. 그러나 양곤으로 가는 버스는 전투로 인해 오직 한 편 밖에 없었고 그나마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속절 없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일주일 후, 저는 버스 기사로부터 출발에 대한 연락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전투 중에 양곤으로의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출발 첫 날, 4시간 30분의 운전 끝에 버스는 아주 작고 가난해 보이는 마을 조그마한 동네 노점 앞에 멈췄습니다. 점심시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버스는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전투 때문에 멈춘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상황은 매우 심각했고 우리는 전투 지역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그 곳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버스가 밀려 서 있었고 승객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추후 공지할 때까지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승객 모두는 머물고 잘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밤 사이 모기에 물릴 것을 생각하니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자야 할지, 어디로 잘 곳을 찾으러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집들도 너무 작아서 승객들 모두가 머물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집은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찼고 머물 곳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야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오~ 하나님, 한 여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감사하게도 숙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강가우 를 떠날 때부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투 상황에 길을 떠났기 때문에 옷과 담요를 여유있게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옷과 담요는 없었지만 저와 두 아이는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 온 첫째 날에는, 먹을 것을 작은 판에 담아 들고 다니는 행상인에게서 먹을 거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2일 차부터 4일 차까지 지내는 동안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서 대기하는 4일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식량을 은혜롭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마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셋째 날, 그 지역의 PDF 리더가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우리가 전투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날 아침, 드디어 PDF 병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민중방위군 군인들은 우리를 잘 보호하며 존중해 주었습니다. 버스는 큰 도로로 갈 수 없었고 이상하고 험하고 바위가 많은 숲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테러리스트 군인들이 큰 도로에 지뢰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버스가 통과한 대부분의 마을은 테러리스트 군대에 의해 불탔고 심지어 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이번 양곤 여행은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6시간여의 버스 운행 끝에, 공터에 작은 천막들이 쳐 있고 많은 사람들이 먹을 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안내해 주던 PDF 리더가 알려주길, 우리 앞에는 테러리스트 군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 밤은 이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몇몇 PDF 병사들이 5구의 시신을 운반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경험은 한밤중, 시신을 화장하는 깊은 숲 속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숲속 추위에 따뜻한 불도 담요도 없이, 달려드는 모기와 싸우며 잠을 계속 청하다 날을 맞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5일 째 되는 날 아침, PDF 리더는 우리에게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버스는 테러리스트 군대가 출몰하는 지역을 피해 마을과 마을, 숲과 숲을 지나 하루 종일 달려갔습니다. 그 날 저녁 늦게, 우리는 파코쿠(Pakokku)로 가는 예사교(Yesagyo) 교차로에 무사히 도착했고 관할 지역의 끝인 그 곳에서 PDF 병사들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마궤 도 및 사가잉 도의 PDF 병사들은 모두 테러리스트 군대에 맞서 싸우는 젊은 영웅들입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삶과 미래, 가족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저도 그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테러리스트 군대가 통행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밤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아 저희들은 파코쿠에서 야영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다음날 6일째 되는 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양곤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양곤 가는 길엔 통과해야 할 검문소가 엄청 많았습니다. 검문소에는 완전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고, 의심되면 아무 질문 없이 총을 쏘거나 체포했습니다. 우리는 6일째 되는 저녁, 양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강가우에서 양곤까지의 여정은 하루(20시간)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꼬박 6일이 걸렸습니다. 너무 무섭고 생명이 위협받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축복과 보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두 자녀는 930일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였고 그리워하던 남편을 3년 만에 만나 지금 부평의 한 방에 온 가족이 평화로이 머물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여정과 같은 상황으로 저희 고향 강가우로 다시 돌아가라 한다면, 솔직히 못 갈 것 같습니다. 가족의 안전과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에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22. 10. 28

 

속히 평화가 오기를 기도하며,

 

부평에서 니니리 드림 (민뚜 목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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