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희년공동체/희년네팔인교회(주선미 1995~)

네팔 방문 선교보고 - 평화를 던져줄 평화의 집 어린이 [2005년 2월]

희년선교회 2024. 7. 14. 11:16

네팔 방문 선교보고

 

평화를 던져줄 평화의 집 어린이


주선미 선교사


네팔의 산하는 그대로였다. 항상 희고 밝은 모자를 쓰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이 나즈막한 산들 뒤로 희끗희끗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정이 가지 않는 먼지길과 매연들도 그대로이다. 밤에 도착한 우리 일행 6명은 사실 이런 모습을 네팔의 첫인상으로 보지는 못했다. 어두운 차내에서 확인한 얼준의 모습은 히말라야처럼 밝았고 먼지길처럼 좀 촌스러워져 있었다.


평소에 얼준을 알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시던 분들 6명이 2005.1.25에 그가 네팔에서 드디어 보육원 평화의 집을 열게 되어 격려차 네팔을 방문했다. 임용석 목사님- 쉼터에서 요양 중일 때 사골도 많이 사 주시고 목욕도 가끔 같이 가고 가끔 바람 쐬러 밖에도 데려 가고 매일의 말씀으로 격려하셨었다. 그리고 수술비 모금도 많이 애써 주셨고......... 현정남 전도사님-입원하고 수술할 때마다 낙심한 형제를 언제나 말씀으로 끌어올리시고 정기적인 성경 공부반도 이끄셔서 욥과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그 외 여러 말씀으로 꼭 잡아 주셨었다. 그리고 그가 네팔에서 다니러 왔을 때 보육원을 열겠다는 그의 믿음어린 고백을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신 유일한 분이셨고......... 문경기 형제님-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희년을 방문하던 그가 자신의 발목이 골절됨으로써 더욱 그를 이해하고 격려해 주었던 사랑많은 형제이고...........로라 자매님-탈북자를 향한 긍휼을 갖고 한걸음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달려온 자매인데 이번에 네팔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함께 가게 된 자매이고.............윤옥란 권사님-주안 장로교회 네팔 공동체를 섬기고 계신데 그 공동체를 위한 목적으로 방문하시지만 얼준의 보육원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하나님 사랑으로 항상 행복하시다는.............주선미 선교사-필자 이렇게 다양하게 준비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네팔로 부르셔서 아름다운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들은 얼준을 위하여 기도하고 후원하고 보살핀, 갈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함께 하신 수많은 분들을 대표하신 셈이다.

보육원 평화의 집은 카트만두 순환도로 밖 큰 불교 사원이 많이 자리 잡고 있고 지방의 부자들이 마오이스트의 괴로움을 피해 올라와 좋은 집을 짓고 사는 싸노 버렝이라는 동네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산에 인접한 토박이만 있었는데 논과 밭을 사들여서 새로운 집을 여기 저기 지어 동네가 많이 변한 것이라 한다. 앞으로 집값은 자꾸자꾸 오르기 때문에 땅을 빨리 살수록 좋다고 하는데 지금도 굉장히 비싼 상태이다. '평화의 집은 조그만 2층 월세집에 위치해 있다. 1층에는 컴퓨터와 이번에 사 준 세탁기가 놓인 사무실(사무실 안에 수도와 하수구가 있었다. 아마 원래 부엌 공간이었나 보다.), 2층 침대가 있는 아이들 침실, 개인별 사물함과 책장이 설치된 아이들 공부방이 있고 화장실이 있다. 그 화장실에 이번 방문팀이 순간 온수기를 달아 주어서 그 전처럼 물을 일일이 데우지 않아도 쉽게 따뜻한 물로 목욕시킬 수 있게 되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부엌이 있고 이번에 사준 냉장고가 빛나게 자리하고 있다. 아이들 식당겸 예배실이 있는데 여기서 미팅도 하고 이번 개원식도 이 좁은 방에서 했다. 그리고 방 2개가 있고 화장실이 있으며 위로 옥상이 있다. 이 공간에서 아이들 11명과 얼준의 조카 그리고 앞으로 더 올 예정인 2명의 고아가 생활을 하고 얼준의 부인이 교사로 섬기며 도우미 아주머니 한분 그리고 신학교 들어갈 학생이 개강 전에 보조 교사로 돕고 있다.


얼준 부부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을 보고 좋아하던 주민들이 아이들이 나다니기 시작하고 보육원을 한다니까 동네에서 시선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마당도 없으니 옥상에서만 뛰어 놀 수 있을 것 같다. 교회갈 때는 줄을 서서 떠들지 않고 얌전하게 외출을 한다. 우리가 간 다음날 바로 함께 미니버스를 타고 외출을 했는데 아이들 모두가 멀미를 하여 토하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보육원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외출도 안 해봤고 어떤 아이는 보육원 올 때 처음으로 차를 보았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밥을 처음으로 본 아이도 있다고 한다. 네팔의 주식은 쌀이지만 산골에서는 옥수수나 귀리 가루 반죽으로 주식을 삼는데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아이는 늘 말을 안 하고 감상적인 시선만 창밖으로 보내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네팔어를 모르고 지방말만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남자 같은 여자아이들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머릿이 때문에 머리카락을 다 깎아 주어서 그렇다고 한다.


네팔의 규정으로는 편부모만 있어도 고아로 인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부모가 다 없는 아이도 있지만 대개는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어머니는 가출하셨거나 너무 많은 자식을 다 양육할 수 없는 어머니가 보낸 아이들도 있다. 모두 지역의 목사님을 통해서 신중하게 심사숙고하여 돈 있는 사람의 자녀가 오지 않도록 잘 선택했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가난한 전도자였는데 전도하고 오다가 강물의 소용돌이에서 익사하셨다고 하고 같은 곳에서 사고를 당한 동네 또 다른분의 아이도 와 있다. 기독교 가정 배경이든 아니든 아이들은 벌써 찬양 율동을 유연하게 하며 성경구절 및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유창하게 암송한다. 기도할 때는 통성 기도 시간을 자주 갖는데 아이들의 진정한 통성 기도는 예배실을 울릴 정도다. 어떤 꼬마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기도를 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한사람 한사람 얼굴을 보면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아직 이불에 오줌을 잘 싸는데 그것 때문에 오줌 싼 아이는 그날 하루 풀이 죽어 조용하고 다른 날은 오늘 나 오줌 안 쌌어요하면서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모두 귀엽고 천진하고 밝다.

보육교사 교육을 받고 보육 교사 경험도 있으며 신학교를 마친 얼준 부인 데비는 철저하게 시간을 지키며 아침 세면, 청소, 티타임, 아침 예배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게 하고 학령기가 넘은 아이들을 처음으로 입학시키는데 뒤지지 않게 공부도 시키고 숙제도 내고 저녁에 식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네팔 TV에 어린이 시간도 별로 없고 그 시간에 공부 시키느라 아이들과 저녁에 드라마를 함께 보며 힌두 의식 같은 것 나오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심어준다고 저러면 돼? 안 돼?’ 하는 식으로 교육하는 미숙한 아빠 옆에서 기대고 침대 이불속에 함께 발 뻗으며 가정의 따뜻함을 소리 없이 느끼는 동안 평화의 집일가족은 평화로운 밤을 맞이한다.

개원식 전날 토요일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서 신대원 과정 하시고 돌아가 개척을 하신 라즈 꾸말 라나 목사님이 인도하는 은혜 축복교회 아주 좁은 예배실에서 60명 정도 모인 가운데 함께 가신 현정남 전도사님이 설교하시고 희년에서 돌아간 비놋형제가 통역하였다. 비놋 형제는 어떤 사진사의 컷 속에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말씀을 흡입하는 인상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말씀을 깊이 사모하는 형제이다. 네팔에 돌아간 뒤로 결혼과 네팔 생활에 적응하느라 약간 교회에 소홀해진 느낌은 있었으나 그날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첫 소원을 그대로 품은 채 말씀이 주는 은혜를 영혼 깊은 곳에서 퍼올려 통역하는 모습을 감사함으로 지켜 볼 수 있었다.


현 전도사님의 말씀은 마침 그들 중 몇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선포되었는데 한국 교회를 거쳐서 돌아온 수많은 네팔 사람 중 주의 일을 위대하게 해내는 몇 사람이 되자라는 의미로서네팔을 구원하는 구령의 뜨거움에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예배가 되었다. 여기서 돌아가 얼준을 통하여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니 정말 더없이 반가왔다. 신앙이 쌓여 가도록 기도 해야 할 일이다.

130일 개원식날이 되었다. 한국 음식, 네팔 음식 두가지 다 준비하느라 사실 이틀 전부터 계속 바쁘게 움직이고 그날에는 오전에 한인 교회를 잠깐 다녀오기도 하였다. 예상했던 60명보다 훨씬 많은 90명이 방문을 하였다. 한국사람으로는 선교사 3, 장미회 박종철 장로님과 서교동 교회 청년부, 우리 방문팀이 있었고 네팔인으로는 얼준 부부를 지도한 존경받는 목사님들 외에 한국에서 돌아간 사람들, 가족, 교회 교인들, 지인들이 방문하였다. 여러 설교와 격려사를 통해 얼준의 믿음의 첫발을 축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게 되어 기뻤고 본인의 눈물 섞인 경과 보고 및 간증은 개원식의 꽃이 되었다. 오히려 서교동 교회 청년부와 보육원 어린이들이 옥상에서 식사를 할 때 보여준 꽃처럼 아름다운 율동 찬양보다 더 꽃다웠다. 옥상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여운 율동에 감탄하고 네팔의 청년들은 서교동 교회 청년부의 발랄한 찬양 율동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국 청년들은 다 이렇게 예쁘고 기막히게 춤을 잘 추냐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개원식 참석이 주 방문목적이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비놋, 너빈, 수버드라, 바산, 싸테와 너레스, 디퍽, 써리따, 라즈 꾸말 목사님의 가정들을 방문했다. ‘평화의 집보육원을 보는 것은 또 그 장소를 중심으로 희년, 혹은 한국에서 돌아간 청년들을 바라보는 믿음의 둥지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돌아보는 것도 아주 의미 깊은 일이 되었다. 희년에서의, 한국에서의 사랑을 잊지 말고 그 곳에서 새로운 불씨를 지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보육원 두 군데를 가 보았고 선교사님 가정과 한국 식당도 한 군데, 또 힌두 명소 더친 칼리와 유네스코가 지정한 오래된 도시 박타풀‘, 카트만두 계곡을 설명할 수 있는 협곡 들을 돌아 보았고 히말라야를 잘 보기위해 가려던 둘리켈은 그날부터 갑자기 선포된 왕의 비상 명령으로 사태가 급전되면서 가보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마오이스트들이 3일간 네팔 전역에 교통을 통제한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에서 통제 하루 전에 왕이 전격적으로 모든 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모든 통화가 차단되었고 비행기 운항도 취소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운항 확인차 항공사에 들렀는데 인터넷 기능도 안 되어 그냥 공항에 직접 가라는 것이었다. 한국 대사관에서는 교민들에게 통신이 안 되니 만일의 사태에 보호하지 못할 상황도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할 것을 공문으로 돌렸다. 그러나 교통은 통제되지 않았고 비행기 운항도 하루 이틀 후부터 다시 운행했으며 오히려 밖에서 걱정했던 것보다는 거리는 평화로웠고 상업 활동은 활발하였다. 마오이스트들의 횡포로 늘 혼란스러워서 왕이 이렇게 통제한 것은 일단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반응들이 있었으나 이것은 15년전 피를 흘리며 왕정으로부터 쟁취하여 다당제 민주정으로 확보한 것을 다시 거꾸로 돌려 버리고 모든 집회, 결사, 언론, 종교 등의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이것만은 되돌려서는 안 되는 왕 독재 정치를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며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당제를 이끌어 가던 정치인들과 각료들이 그동안 보여준 혼란상으로 마오이스트들이 기승을 부리고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할말도 없는 터이기도 하다. 통신을 두절시키고 비행기 운항을 하루 이틀 금지한 것은 부패한 정치인의 도주를 금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라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평화의 집아이들은 순수하고 아름답게 주님의 손안에서 자라날 것이고 이 혼란스럽고 마음이 아파오는 네팔 나라에 평화를 던져 줄 귀한 복음의 전사들로 키워질 소망을 가지고 품에 안아 머리 꼭지에 손대고 눈물어린 깊은 사랑으로 기도해 줄 일이다. 사실 떠나오기 전 마지막날 현전도사님과 함께 어린이 한 명 한 명씩 안고 이런 감격스런 기도를 했다. 우린 일시적이지만 이 아이들의 영원한 엄마 아빠가 될 얼준 부부의 헌신, 사랑, 기도에 대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같은 마음을 품고 기도해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