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희년공동체/희년네팔인교회(주선미 1995~)

귀한 대접 받고 가오 [2007년 2월]

희년선교회 2024. 7. 14. 15:54

 

 

 

귀한 대접 받고 가오


주선미 선교사



어떤 사람이 대전에서 서울로 오려고 열차를 타니 자기의 좌석에 한 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합니다. 그래서 좌석 표를 보이며 자기 자리라고 하며 자리가 틀린 것인지 자리가 없으신지 여쭈니까 없다고 하시며 멋적게 일어나셨답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에 앉는 대신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자리에 못 앉는 것은 조금 슬픈 일이지만 2시간 거리니까, 또 앉아 있을 때보다는 처음부터 양보하는 것이 쉬우므로 그냥 가기로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 어르신은 내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답니다. “귀한 대접 받고 가오. 출입 간에 형통하기를 축원 하오


우리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들로부터 귀한 대접받고 갑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출입 간에 형통하시기를 축원 합니다이런 정중한 감사의 표현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은 야성이 있는 민족이어서 좀 거칠고 체계적이지 않지만 순발력이 있고 부지런하고 목표를 위해 정진하는 투지력이 있죠. 이러한 점을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장점으로 보기도 하고 의아하게 보기도 합니다. 네팔 민족들은 이러한 야성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문화적, 인격적인 대우를 최우선으로 하는 분위기 때문에 남에게는 배려하는데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할 말을 분명히 못하고 그렇다고 당할 수만은 없어 작업장 이탈하기, 단체로 움직이기, 여러 친구들의 말만 듣고 피해 의식에 차서 결정하기 등의 생존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측으로부터 욕을 먹고 불신의 슬픈 고리는 계속 순환됩니다. 올해 일 년을 돌아볼 때도 부당한 대우들의 사례가 많았습니다.


발렌드라는 3년전 회사에서 월급을 주지 않아서 계속 달라하며 주지 않으면 그만 두겠다고 하고 나서 어느 날 그만 두었는데 불법으로 도망간 것으로 괘씸하게만 여길 뿐 월급은 끝내 주지 않아 지쳐서 그 다음에는 연락 안 하다가 다시 연락을 하니 그 때는 기억도 없다고 하고 안 줬을 리가 없다고 하고 안 줬다는 증거가 없다고만 하니 노동부에 호소해도 3년이 넘은 시점이라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난감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빨리 돌아오라는데 이 친구의 마음은 참 답답합니다.


뿌르나는 연수생으로 일하게 된 회사에서 상습적으로 맞았습니다. 대개는 구타 수준이라 할 수 없지만 놀리듯이 슬쩍 슬쩍 건드리는 것이 차라리 화가 나서 구타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지요. 다리를 한 대 때려 놓고 아프다고 하니까 요기는? 요기는? 하면서 장난쳤다는 얘기가 정말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어느 휴무일 날 외출하고 왔다는 이유로 다음날 정상적으로 출근했는데도 불구하고 차장에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구타 후에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지도 않고 밖으로 질질 끌고 가서 차렷 자세로 몇 시간을 세워 놓았답니다. 그래도 성실히 일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점심 식사 후 계속 일을 했는데 뭔가 사과의 말을 할 줄 알았던 사장님이 일언반구 없어서 그는 그만 두었습니다. 나중에 전화로 사장에게 따지니 그 친구가 한국 문화를 잘 몰라서 과장되게 얘기했다고 말합니다. 과연 한국 문화가 그런 것일까요? 군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등병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아난다는 출입국관리 직원에게 단속당하면서 어깨가 탈골되었습니다. 출입국 직원은 그를 회사 앞에 그냥 내려다 놓고 치료도 해주지 않았답니다. 그는 결국 본인이 치료비를 내서 치료를 하였으나 아직 완치되지 않았고 무섭고 엄격하게만 보였던 출입국관리 사무소 직원의 비겁한 방치 행위에서 비감보다는 오히려 황당함을 느꼈답니다.


샴과 일행은 연수생으로 재활용 처리 작업장에서 일을 했는데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일은 하겠는데 정작 그만 둔 것은 이불을 재활용에서 나온 더러운 것으로 주고 여러 가지 위생생활이 곤란하도록 방치한 사장님 때문에 그만두었습니다. 일할 때부터 계속 가렵고 뭐가 나서 피부과에 가 보니 옴에 올랐다는군요. 꿈에 부풀어 온 한국의 첫 직장에서 쓰레기 작업을 하고 쓰레기 속에서 나온 더러운 이불을 덮고 결국 옴까지 오르게 된 이들은 사실 어머니나 아내의 정성스런 손길이 닿은 정갈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환송을 받으며 출국했을 터였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2006년에 있었습니다. 레크미는 크리스나 전도사님의 처남입니다. 그는 그의 집에서 제일 먼저 예수 믿은 누나 써리따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악기로 예배를 섬기면서도 사춘기 시절 방황도 했었는데 어느 날 그는 혹독한 경험을 하면서 완전히 회심하고 주께 삶을 온전히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인 형이 있는 인디아에 가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2년간 전도자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주변의 섬세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잘 보살피고 섬겼습니다. 네팔로 돌아온 후 다시 한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오자마자 연결된 인천 남동공단의 선교회에서 네팔인 예배와 영어 예배, 그리고 쉼터 사역을 성실히 감당하며 1년 반이 지나 희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있는 동안 신대원을 가지 못하여서 결국 현재까지 한국에 온지 2년이 지나도록 신학교 입학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산기도와 금식 기도를 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년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희년 쉼터에서 섬기게 되고 최근에는 아주 적은 교통비만 받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쉼터 사역은 상당히 역동적입니다. 조용한 듯 장난기 넘치는 태도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면서도 리더십이 있어 쉼터에 오는 이들을 영적, 사회적으로 잘 통합하고 새 신자를 만들어 내고 네팔 예배를 일으켜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새해부터 마천의 교회에서 네팔 공동체를 섬기러 주일에 가고 있는데 주일날 그가 없는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고 알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올 정도입니다.


레썸은 근로자 출신으로 희년 네팔 공동체에서 회심한 후 성경 말씀에 많이 갈증을 느끼던 중 안디옥 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학부와 신대원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줄곧 우등을 하고 가정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을 텐데 신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의 삶은 이제부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네팔에서의 교회 생활 경험이 없다 보니 섬기고 세우는 데에 더 훈련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빨리 네팔에 돌아가 네팔의 현지 교회에 들어가 낮은 곳에서부터 섬기며 훈련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그가 잘 일어서도록 기도와 후원이 필요합니다.


람 르우벤은 본국에서 예수를 믿으면서 집에서 쫓겨나고 상속받을 땅도 못 받게 되는 어렵고 가난한 처지에서 음악을 사랑하고 OM선교 여행도 같이 다니며 찬양에 헌신한 형제입니다. 한국에서 희년 네팔 공동체에 오게 된 뒤로 줄곧 예배와 찬양을 섬기고 영감 있는 목소리와 강한 비트의 기타 반주로 형제들의 영성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를 따라 저희 네팔 공동체는 찬양을 좋아하고 찬양의 바다에 곧바로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해 집니다. 그와 함께 씽어로 섬기고 있는 라울 형제도 호흡을 잘 맞추어 아름다운 찬양을 이끌어 냅니다. 2007년부터는 네팔에 koika로 가 있었던 영락교회 김은영 자매가 피아노 반주로 함께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와 아울러 2007년부터 영락교회 봉사관 504호로 자리 잡게 된 예배실에서 맘껏 찬양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이외에도 감사한 일이 많았습니다.
우선 영락교회로 입양된 일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입양 이야기가 나오고 옮기고 정착될 때까지의 1년간 영락 교회 선교부, 선교 제자단, 4남 선교회, 그리고 많은 분들의 돌봄과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연수생 송출회사인 문드랍스 사무실이 마침 가까이에 있어 네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 들어오고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네팔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외출에서 돌아올 땐 먹을 것들을 사들고 들어오고 아침저녁 예배 시간을 사모합니다. 네팔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속도는 느립니다. 그러나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지하에서 깨끗한 건물 4층으로, 작은 놀이터에서 환경이 좋은 체육공원으로, 냄새와 소음, 외모만으로도 눈총을 받던 빌라에서 당당하게 지낼 수 있는 영락교회 소유의 외국인 쉼터로, 그리고 옥상에 아담하게 지어진 예배 처소와 햇볕을 마음껏 쬐며 빨래를 말릴 수 있는 옥상, 교회 예배실도 기다린 끝에 좋은 곳으로 결정되었고 그 예배실에서 팀웍이 잘 되는 찬양팀이 구성된 것....... 이 모두가 축복입니다. 오랫동안 걱정했던 가리봉 지하 쉼터 매매도 무사히 이루어져 그것도 무척 감사하구요. 희년이 생각나고 마음의 고향처럼 여겨지는 이별의 아픔도 있지만 이런 성장통을 이겨내고 무럭무럭 자라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와 송구영신 예배엔 옥상의 예배처소가 터지도록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50명도 넘게 모였으니까요. 이들은 교대로 노래를 부르는 또리꼬 깃을 아주 신나게 부르는데 재치 있는 노랫말의 경쟁과 그에 반응하여 뒤로 넘어지며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즐거움,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신명나는 놀이이지요. 춤 못 추는 이 주디디(주선미 누나)도 꼭 끌려 나가 어색한 춤을 춰야하는 봉변까지 포함해서요. 매주 수요일 드리는 러시아와의 성경 공부도 아주 훈훈합니다. 최영규 전도사님의 말씀이 간단하면서도 은혜가 넘쳐 한 주간 내내 묵상하고 적용하기도 하는데 그 여운이 깁니다. 우린 매주 교대로 음식을 장만하는데 러시아 음식을 먹는 날엔 수고하지 않고 향기로운 빵 냄새를 맡아서 좋고 네팔 음식 먹는 날엔 맛있게 만들려는 기분 좋은 의욕과 칭찬으로 즐거운 시간이 됩니다.

2007년이 시작되었군요. 2008, 2009, 2010년도 앞으로 다가오겠지요.
즐거웠고 고마웠던 2006년처럼 이 앞으로의 시간들도 이런 이야기들로 쌓아가다 보면 돌아가는 그들에게서 분명히 그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귀한 대접 받고 갑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출입 간에 형통하길 축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우린 한 형제 된 마음으로 천국에서 꼭 만나요. 한 명도 빠지면 안 돼요. 이름 다 적어 놓을 거야라며 손을 흔들어 주겠지요.

 

네팔 공동체 기도제목


1. 네팔 공동체가 주안에서 성숙되고 주 영접하는 자가 늘어나도록
2. 예배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에 순종하고 말씀을 전하시는 보즈 목사님과 찬양팀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도록
3. 보즈 목사님이 본 교회를 돌보기 위해 1월말에서 2월 초까지 다녀오시는데 잘 다녀 오시며 공백 기간 동안 예배가 잘 이루어지도록
4. 주선미 선교사가 네팔의 보육원 평화이 집을 둘러보고 귀국 네팔인을 돌아보려 1.14-24까지 다녀 오는데 성령과 동행하시며 공백 기간 동안 예배와 쉼터를 주님이 지켜 주시기를
5. 레크미의 신학 입학과 쉼터 사역비가 채워지며 주의 위로 가운데 잘 섬기도록
6. 레썸 형제가 네팔에서 훈련 받을 교회를 인도받고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며 필요한 재정이 채워지도록
7. 월급을 받지 못한 형제들과 직장이 없는 형제 자매들이 빨리 해결함을 받도록
8. 필요한 물품이 채워지도록........일렉트릭 기타, 드럼(예배실), 오디오, 전기밥솥, , 탁구대(쉼터)
9. 네팔 평화의 집의 주택 구입비와 월 생활비가 채워지도록
10. 네팔 평화의 집 아이들이 영육간에 강건하게 자라고 원장 얼준 형제가 늘 주안에서 겸손하게 섬기도록

 


* 네팔 평화의 집은 지난 12월 초에 국제민간교류협회의 도움으로 우선 대체하여 주택을 구입하였습니다. 후원하신 분께 감사하고 더 채워야 하는 재정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평화의 집 소식은 네팔 방문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