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 럼/이만열 (초대 대표, 1993.6~2020.2)

‘희년’의 이상과 과제, 그리고 사역정신 (이만열 )

희년선교회 2021. 9. 8. 22:05

외국인 근로자를 향한 <희년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해 온 지도 13년이 지났다. 한국을 찾은 나그네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한국인의 정을 전하면서 그들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한편 희년(禧年)’정신을 그들 속에 이루도록 하자는 것이 소박한 꿈이었다. 굳이 희년이라 이름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희년법과 희년정신을 오늘의 시점에서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희년정신은 간단하게 말하면 자유와 자립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그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경제적 기반을 주셨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나 사회적 무능력자로 전락되었던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존엄성과 경제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상실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경제적인 토대를 일정한 시기가 되면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렇게 회복시켜 주는 해를 희년(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후의 첫 해)이라 했다. 희년을 맞으면 그 동안에 종 되었던 자들은 아무런 조건없이 종에서 해방되어 양민(자유민)으로서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양민이 되어도 경제적 토대가 없으면 다시 종으로 전락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으므로, 희년에 자유민이 되면 자유민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또한 제공했다. 종이 되기 전에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경제적인 토대인 토지를 되돌려 받았던 것이다. 희년은 이렇게 종 되었던 인간을 자유민(양민)으로 회복시켜 주는 한편 그 경제적 토대도 제공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해야말로 복되고 기쁜 해희년이라 불렀다.

 

13년전 우리는 성경의 이 희년정신을 이념으로 하여 희년운동을 시작했다. 희년의 이름을 걸고 그 동안 얼마나 이 하나님의 희년법 정신에 충실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우리는 외국에서 온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여러 공동체를 조직케 하고 그들의 공동체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고 믿도록 하는 데에 노력해 왔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전하고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려는 것이다. 각국의 언어로 하나님의 이 뜻을 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도록 했다. 그런 정신적 기반 위에서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를 격려하는 활동을 하도록 이끌어 왔다.

 

3년 전(2003)에 우리는 희년에서 수행하고 있는 선교인권활동과 의료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사단법인 국제민간교류협회를 발족시켰다. 우리 기관의 목적을 좀 더 실천적으로 넓히기 위한 뜻에서 이런 법인을 설립했다. 희년의 많은 헌신자들이 희년의 숭고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많은 교회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료에 종사하는 전문의료인과 의학도들이 매주일 꾸준히 봉사해 왔다. 이런 끊임없는 헌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값진 것이어서, 이 세상에서는 상응하는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으로 믿는다. 히브서(116)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봉사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나 이런 믿음이 확고하게 서 있을수록 우리는 법인을 설립할 당시에 꿈꾸었던 비전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늘 고민하면서 기도하고 문제를 드러내 놓고 토의하고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희년운동의 1차적인 목표가 하나님사랑을 전하고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인 만큼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민족별 언어별 공동체를 두고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 필리핀(혹은 영어권) 공동체와 몽골러시아 공동체, 베트남 공동체, 두개(서울과 광주)의 네팔공동체, 방글라데시 공동체 그리고 쿠르트 공동체 등이 있고 또 해외에 우리와 뜻을 같이 하고 있는 공동체적 모임들이 있다. 그 동안 각 공동체는 사역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들도 희년의 이념에 공감하면서 힘껏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우선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본부와 지체공동체 사이의 연계관계도 그렇고 각 지체공동체 간의 연합적인 노력도 매우 저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희년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해결의 방략이 뚜렷이 제시될 수는 없지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자주 모여 기도하고 선교적인 협의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통사역의 최선의 방략을 터득하고 격려하면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국제민간교류협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해외의 선교사들과의 연계도 모색해야 한다고 구상했다. 그러나 역량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괄목할만한 성과를 갖고 있지 못하다. 법인화된 이 기구를 활용하여 선교적인 차원에서 민간교류를 활발하게 진행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뜻만큼 진전시키지 못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성원을 기대한다. 기독교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곳에 대해서는 전략적으로 국제민간교류협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어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접근한다든가, 한국어 능력시험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것도 고려해 볼 것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 선교에 뜻을 둔 여러 독자들의 지혜와 전략적인 방략도 구해보고 싶다. 이것은 또한 국제민간교류협회가 선교단체 혹은 뜻있는 교회들과 협동하여 진행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희년은 한편 의료지원을 통해 이국에서 병든 몸을 치료받도록 도우려고 했다. 이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받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희년 정신에 충실했으며 외국인 나그네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건강을 돌볼 때에 복음이 함께 가야 한다. ()료 행위는 아직은 외국인들과 만날 수 있는 접촉포인트요 복음전파의 기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아쉬움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낀다. 좀 더 그들을 도와 하나님의 사람과 한국인의 정을 듬뿍 쏟아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좀 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할 모임이 자칫하면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교제공동체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기독교 복음을 동시에 전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사라진 의료 및 각종 봉사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다.

 

민간운동을 하면서 늘 예상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문제점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희년운동은 어디까지나 이 이념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원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어왔다. 이런 운동은 선한 뜻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격려하여 그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헌금에 의해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이나 기구가 있음으로 그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선한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고 뭉쳐지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점차 그런 이상적인 방향과는 다른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자발적인 지원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측에서도 잘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선한 의지를 잘 담아내거나 묶어내는 데에 게을렀거나 방법이 서툴렀다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점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자발적인 지원이 축소되면서 이 운동이 점차 공공기관이나 특수한 기업의 도움을 받는 운동으로 변질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희년운동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작은 손들이 점차 사라지고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도움이 늘어나게 되면, 일하기는 쉽게 될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기독교운동으로서의 영성이 죽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희년운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가진 것이나 의지할 데가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날마다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운동이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우리를 돕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현재 점차 늘어나고 있는 대기업 공공기관의 지원을 전적으로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도움이 늘어나서 소액 지원자들이 더 줄어들게 되면, 이 운동을 통해 많은 선한 의지를 묶어보려는 애초의 목적은 많이 퇴색할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희년적인 이상을 실현하려는 우리의 목적이 제대로 살려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희년운동을 하면서 항상 명심해야 할 일은, 이 운동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다. 희년이 처음 시작할 때에 이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복음 63)”는 우리 주님의 명령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10)”는 주님의 권고에 희년 사역 정신의 근거로 삼았다. 때문에 희년이 10년이 넘는 역사와 주변의 외국인 선교단체들보다도 적지 않게 사명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본다. 일을 하면서 스스로 드러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했고 늘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를 갖도록 스스로를 훈련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적인 명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부패성과 자기과장성은 이런 운동을 하면서 많은 유혹을 받는다. 가장 자주 받는 것의 하나는 무심중에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자랑의 유혹이다. 많은 기독교 기관들이 그런 유혹에 빠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유혹은 끝 없이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희년이 앞으로 그 사역을 끝내지 않으면 안될 그런 시련에 처하게 되는 것도 아마도 이 유혹에서 얼마나 자유스럽게 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하신 앞서의 말씀과 관련,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다소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세상은 자기선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희년사역을 세상 언론에 적당히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이 시대정신과 연결시켜 보더라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석하고 융통성 있게 행동한다고 해서, 굳이 주님이 주신 명령과 권고에 위배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년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역하려고 한다면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사역이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의해 이뤄진다고 믿는 이라면 더구나 예수님의 명령과 권고에 따라야 한다. 희년사역을 더 크게 확장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기뻐하는 일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형교회를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그들 중에는 물신 바알을 섬기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현재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그 영광을 가로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했지만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그 교회에는 이미 그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희년을 위해 기도하면서 유의하는 대목이 있다. 희년이 남이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도록 기도한다. 또 희년이 행하는 작은 일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은은하게 주변에 발해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몇 년 전에 네팔로 돌아가던 한 형제가 우리들에게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돌아가서 당신네들이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이것은 희년이 하는 일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은 외국인을 감동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희년이 아무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영광만 받으신다면 당신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 희년을 스스로 드러내실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아무리 무익한 종으로 노력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에 우리를 유익한 종으로 활용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희년의 사역정신이고 희년의 믿음이다.

 

(2006.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