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 럼/이만열 (초대 대표, 1993.6~2020.2)

韓·네팔 잇는 아름다운 가교 (이만열)

희년선교회 2021. 9. 8. 22:13

얼준 둥겔, 그는 한국에 와서 9년간 체재하다가 조국으로 돌아간 네팔 청년이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돈을 벌어보자는 코리안 드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벌이에 실패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돈만 가지고 따진다면 그는 한국에서 마이너스 인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를 이 칼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귀국 후 우리와 맺은 관계가 한국과 네팔을 잇는 아름다운 가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에서만은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는 식의 일방적인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고 또 외국인 근로자들을 통해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의 한 사례로 될 수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TV를 보는 전 세계에 경기의 화려함 못지않게 한국의 모습을 일신시켰다. 한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해외 동포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남아의 젊은이들도 한국을 주목하고 한국에 가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관광비자 하나만 달랑 들고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전락, 3D업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y) 위험스러운(dangerous) 3D 업종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는 IMF 때의 일화가 잘 말해준다. 그 때 실직자 대책으로 정부는 중소기업에 대해 외국인 근로자 대신 한국 근로자를 고용하면 임금의 일정 부분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에 부응하여 3D업종에 취업했던 한국 근로자들은 대부분 1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한국溫情 감동 네팔청년 ‘얼준’-

 

얼준이 한국에 온 것은 1994년이다. 그는 초기에 본국에 송금까지 할 정도로 벌었지만, 98년 오토바이 사고는 대퇴골절과 전후방 십자인대와 측면 인대 파열에 그 합병증으로 신장결석까지 겹쳐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갔다. 6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대학병원 등에서 11번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섬기기 위해 희년(禧年)선교회를 운영하고 있던 우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일제로부터 갖은 압제를 당했던 한국이 그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채 동남아 근로자들에게 자행하는 무자비한 횡포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희년을 꾸렸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 희년 쉼터에서 기거하며 기독교를 영접했고 네팔공동체를 섬겼다.

 

2003년 귀국한 그는 희년생활을 되돌아보면서 한국인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다. 그 즈음 우리는 귀국하는 동남아인들로부터 희년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곤 했다. 얼준은 한국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자신이 남을 섬기는 데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네팔에서는 힌두교 이외의 신앙생활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 아내와 결혼하고 부모님께도 그의 신앙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이 섬기고도 거기에 대한 보답을 받지 않기 위해 고아원 사업을 시작했다. 2005112명의 고아로 시작한 평화어린이집은 시설 때문에 15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아이들이 모두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이웃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가 되었다.

 

보육원의 시작은 그를 향한 우리의 신뢰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말 우리는 월세로 운영하는 그 보육원 건물을 매입토록 도왔고, 한층 더 올리기 위한 모금에 나서고 있다. 지난 1월 우리 몇 사람이 그 보육원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의 인상이 고아원 아이들 같지 않았음을 보고 놀랐다.

 

-귀국후 고아원 운영 사랑 보답-

 

그는 또 공립학교의 문제점을 알고, 재정 곤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낸다. 얼준의 한국 방문을 주선하기 위해 네팔 한국대사관을 찾았을 때, 남 대사는 얼준의 성이 둥겔이라는 말에 놀라는 듯했다. 둥겔은 네팔의 브라만 중에서도 가장 높은 브라만에 속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단 둘이 있을 때 내가 대사의 말을 확인하려 하자 얼준은 신앙과 아이들을 위해 그 신분은 이미 포기했다고 가볍게 말했다. 지난 2월 우리는 그를 초청했다. 일 년 반전에 앓은 열병 후유증으로 마비된 한쪽 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네팔을 떠나면서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가져올까 물었더니 아이들은, “다른 선물은 필요 없고 아빠의 귀만 고쳐 오라고 하더란다. 찡한 감동을 일으키는 아이들의 이 말은 그의 사랑사역의 현주소를 웅변하고 있다.

 

(2007.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