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 럼/이만열 (초대 대표, 1993.6~2020.2)

한국선교역사와 희년선교회 (이만열 )

희년선교회 2021. 9. 19. 12:56

 한국 선교의 역사를 훑어보면, 1832년 독일 할레 대학 출신이며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인 귀츨라프(Guetzlaff) 목사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부탁으로 중국과 한국과 일본을 순방할 계획을 가졌다. 또한 로버트 모리슨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던 성경을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전달해 주었다. 18656월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는 1860년에 중국 상해에 선교사로 갔다. 그러나 아내가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고 전임자와의 불화로 선교사를 사임하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알렉산더 윌리암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 백령도 지역에서 3개월간 한글을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1866) 그는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평양에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인정되기도 하지만 그가 탔던 배는 상선 임에도 불구하고 무장 했었으며 한국인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1926년 토마스 목사의 기념 사업회가 조직되어 그를 최초의 순교자로 추앙하고 많은 기념사업을 벌였다.

 

1884년 미 북감리교 일본 선교사인 로버트 매클레이는 2주간 한국을 방문하고 김옥균을 통해 한국 선교를 허락받았다. 또 같은 해에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공의 자격으로 입국하였고 아펜젤러는 교육을 통해, 스크랜톤은 의료를 통해 선교하도록 입국하였다. 알렌은 갑오경장 때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치료한 공으로 한국 왕실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광혜원 (훗날의 제중원)을 설립하였다.

 

만주에서 희년선교회의 모델 케이스가 있었다. 중국에 있는 한국인을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여 보낸 과정은 희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전도하고 교육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꿈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중국은 아편 전쟁(1840)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 조약(1842)을 통해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하게 되었다. 1860년대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에서 산둥 반도 북쪽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1870년대에는 요동 반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선교부가 설치되었으며 1870년 말에는 심양, 봉천에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파송되었다. 이들이 만주로 진출한 것은 1869년 산둥에 왔을 때 1863-73년에 대원군이 천주교를 핍박했으므로 그 뒤부터 한국 복음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 목사는 중국에 온 지 3년만에 사서 삼경을 끝 마치고 중국어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74, 75년 경부터 한국 선교의 꿈을 키우며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과의 접촉을 꾀했다. 그는 1877년에 외국인을 위한 한글 교본 (Korean Primer)을 만들었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79년에는 일부가 번역되었다. 성경 출판 3년 전인 1879년에는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들의 복음화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양에 있는 현재 서탑 교회에서 인쇄소를 차리고 18823월에는 누가복음 3.000부와 요한복음 3.000부를 출판하였다. 동경에 있던 선교사 탐슨은 로스가 보내준 누가복음과 요한 복음서를 83년에 한국의 부산과 대구에서 일본인 권서.를 통해 팔았다. 82년에는 김청송, 서상윤 두 명이 세례를 받고 압록강 북쪽 한국인 28개 마을(3만 명 거주)에 복음을 전했다. 84, 85년에는 로스로부터 100여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들이 중국인 지주들의 핍박을 받아 압록강 남쪽으로 피난하여 복음을 전파 했으므로 평안도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86년에는 600여 명의 세례 신청자가 있었다. 의주 출신 서상윤은 83년 서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 결과 6개월 만에 18명이 믿고 세례 받기로 하였으며 85년 초까지 2 년간 사역한 후 중국으로 가서 로스 목사에게 사역보고를 하였다. 로스는 서상윤의 보고를 받고 자신을 도와주고 있던 대영 성서공회에 편지를 보냈다. 다음의 편지는 대영 성서공회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 된 것이다. “그가 사역했던 곳에서 70여 명이 세례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20여 명이 매주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188538

 

한국에 복음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들어온 때는 188545일이다.이 시각은 서상윤의 활동이 서울에서 시작된 이후이며 서상윤이 70여 명 이상의 개종자를 확 보한 이후이다. 이와 같이 한국 선교의 특징을 볼 때 해외에서 예수 믿고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결과이며 외국 선교사가 외국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자생적인 신자가 생기고 난 뒤라고 할 수있다.

 

일본에 있었던 한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88210월에 일본에 건너가 공부 하던 이수정은 일본인 쓰다센의 복음 전파를 받아 예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해 4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 최초의 회심자"로 미국 선교 잡지에 소개 되었다. 그는 1884년에 한문에 이두식 토를 단 형식으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간행하였고 1885년 초에는 한글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으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로스에 의해 번역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수정은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매주일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재일 한인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한국 최초의 복음화의 모습은 사도행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시고 안디옥 교회 등 다른 지방에 교회를 설립 하셨다. 압록강 북쪽의 개종자들에게 핍박을 통해 남쪽으로 건너와 평안도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초기 선교의 특징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특징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에 게 선교하여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 돌아갈 때 본국의 선교사가 되게하려는 우리의 이상에 대한 근거가 되고있다. 1980년대 이후부터 한국 내 외국인의 거주가 본격화되어 90년대에는 내국 거주 외국인 선교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회년선교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친구로 삼아 우정을 나누며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언어와 풍습도 배우며 복음을 역수출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지혜롭게 동원해야 할 것이다.

 

 

199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