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선교묵상
신학을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희년국제선교교회 황호상 목사
주일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거룩하심, 불변하심, 영원하심, 무한하심 등등)을 계속 배워가고 있다. 세상은 전쟁과 온갖 소문으로 난리인데 이러한 때에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아닌 가 할 수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의 때에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절실하다는 것을 성경과 역사가 가르쳐준다. 작년에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로마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던 중에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고난에 처했다는 사실이 새로이 다가왔다. 로마서는 흔히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매우 신학적인 책으로 여겨지지만 그러한 ‘신학’(신학이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배우는 지식’이기에)이 고난 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어야했던 성도들을 위한 편지라는 점을 간과했었다.
신학은 목사나 신학자를 위한 것이고 보통의 성도들은 기본적인 성경의 지식과 삶의 실제적인 적용과 실천이 보다 중요하다며 신학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적용해야 할 성경 자체가 신학을 담고 있기에 바른 ‘신학’(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바른 실천을 위한 중요한 토대이다. 삶의 모든 영역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고난의 이유를 몰랐던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밝혀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심으로 답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다(욥 42:2-5 “나는 주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주께서 계획하신 목적은 좌절될 수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을 가린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되었나이다”).
모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자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화려한 왕궁에서 광야로 간지가 오랜 세월, 다시 광야에서 완악한 백성들을 이끌면서 숱한 고난과 위기를 보내고서는 자신마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했다. 물론 그는 가나안 땅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곁으로 갔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직접 매장해주신 것이 그에게는 보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다(신 34:5-6 “He buried him...” 하나님께서 그를 매장하셨다)
한편으로 그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이 많았던 만큼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사람이었다. 이미 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을 수없이 목도했던 그였지만 백성들의 무수한 반역과 감당 못할 고난 속에서 그에게 더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앎’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였다. “주여 제게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신 33:18).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과 약함’이 평생 따라다녔건만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사도권 마저 의심받아야 했던 바울의 열망은 더욱더 ‘그리스도를 아는 것’(빌 3:8)이었고, 안팎의 고난 속에 있던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벧후 1:2) 구한 사도 베드로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깊은 지식은 누구보다 나에게 더 간절하다. 예고 없이 이미 닥친 낯설은 현실은 시간에 비례해서 익숙해지기는커녕 새로운 도전으로 옷을 갈아입고 찾아온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나의 실제적인 필요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신학’을 더욱 증진시켜 주는 수단이다(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예수님께서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시작하실 때가 고난과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배움을 위해 고난 속에 넣으시고서는 이전에 알고 있던 얄팍하고 가난한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만족과 두려움을 주신다. 그리고 고난을 제거하시는 방식보다는 고난 속에 동참하시면서 고난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그분에 대한 더 깊은 앎을 선사해주신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보통 외적인 언어, 행동, 신체의 기능으로 정의하지만 성경의 참 인간다움은 인간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기에 나는 그 하나님을 더 알아감으로 장애를 가진 아들 유위의 인간다움을 더 발견하고 싶다.
최근에 알게 된 테사 톰슨이라는 여인은 15세 때 청력을 잃고 만성 통증과 희귀한 신경계 질환으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데 그녀가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하면서 받은 응답은 치유가 아닌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 곧 ‘신학을 교정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이었다. 세계적인 단체 ‘조니와 친구들’의 설립자인 조니 여사는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후 ‘고난에 대한 문제’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문제’임을 알고 바른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신학생’이다.
내 작은 바람이라면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실제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평생 신학생이 되고 싶다. 기독교 신앙이 상아탑이 아니라 눈물 없이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지만 그 순례길을 왕이신 그분과 함께 가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혹자가 말하듯 마지막에는 그분께서 ‘모든’ 눈물, 그래서 심지어 기쁨의 눈물마저도 그분을 볼 시야가 가려지지 않도록 다 닦아주실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자”(시 111:10)라는 고백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르고 행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각을 가진 자가 되고 싶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되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성경전체가 온전히 해석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없는 신학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요 5:39, 42)을 유념하여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애쓰는 자가 되고 싶다.
더 알기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하나님께서는 젊은 시절 선교에 대한 신학의 테두리 속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나그네들을,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신학 속에서는 전혀 그림도 없었던 장애인을 가족과 성도로 보내주셔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교정해주시고 계시다. 최근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싶은 열망이 더하다. 갇힌 자며 환난 당한 바울은 성도들에게 한 번도 고난을 면하도록 기도를 요청한 적이 없다. 그와 교회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풍성으로 그리고 성령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심으로 인해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엡 3:13-19).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워가면서 나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영광에 더 기여할 것이 없을 정도로 충분하신 그분께서(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나의 ‘무엇을 필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임을 (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성을 공부하면서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우선적인 사랑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셨음에도(요 17:24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성부께서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들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마치 온 세상 가운데 오직 나만 아시듯이, 나만이 유일한 사랑의 대상인 것처럼 택하신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음을(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암 3:2,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너희만 알았나니...”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깨달을 때 요한 사도의 고백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요일 3:1 “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달리 시작도 끝도 없으시며,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시간의 강력한 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항상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시며 과거와 미래까지도 한꺼번에 소유하시기에 과거 혹은 현재라는 시간과 환경 속에서 나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세상과 사람들의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사랑과 다르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나의 미래까지 포함한 내 인생 전체를 보시며 어떤 오해와 편견도 없이 나를 ‘전체로’ ‘온전히’ 사랑하신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사랑한 어제의 사랑이 오늘과 다르지 않는 시들지 않는 사랑이다. 이 세상의 모든 "떠나고, 버리고, 잃어버리고, 이별하고, 실패하는” 불완전한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결코 떠나거나 실패가 없는 영원한 사랑이기에 내게 영원한 위로이다. 히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 안에서 자족하라. 왜냐하면 ‘결코 아니! 결코 아니!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never—no never—no, nor ever leave you”원어의 의미를 더 충분히 살린 J.C. Ryle의 번역). 모든 만물의 시작 전에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이 없었다는 것은 ‘끝’도 없는 것이며 ‘결코, 아니, 절대’ 떠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다.
거룩의 사랑을 강권하는 하나님의 사랑
사랑의 하나님께서 내게 ‘사역’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르셨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죄인의 진짜 ‘필요’인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의 ‘원함’을 얻기 위해서만 목사와 교회를 찾는 나그네들을 보며 언제부턴가 내심 불평이 늘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내게 놓치고 있던 사역의 동기를 다시 점검하게 하였다. 베드로와 같이 내 존재가 특별하고 가치 있기에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창세전에 먼저 나를 택하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이 나를 특별하게 한 것이고 그 사랑이 나를 부르신 것이다. 그 주님께서 나에게 베드로에게처럼 “네가 ‘이들’(‘이것들’의 의미도 포함된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주권적인 사랑으로 나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내가 ‘이들(이것들)’이라고 생각했던 사역에 대한 나름대로의 나의 기대, 기준, 목표, 열매들, 사람들보다 더 큰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역의 동기이자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함을 상기시켜주셨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나그네들을 향한 사랑이 식어진 내게 “네가 정말 나그네들을 더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으신다. “네가 나를 더 사랑(‘아가페’ 신적인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필로스’)도 바닥난 나로서는 베드로처럼 감히 신적인 최고의 사랑인 ‘아가페’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베드로가 계속해서 ‘아가페’가 아닌 ‘필로’의 사랑으로 대답하자 주님께서 마지막 질문에는 ‘필로스’로 물으시면서 사랑의 수준을 낮추셨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가페’와 ‘필로스’를 교차로 사용하신 용례가 있기에 예수님의 요구는 사랑의 ‘수준’보다는 ‘사랑’자체를 요구하시는 것에 있다.
주님께서는 내게 “네가 나를 최고의 수준으로 완벽히 사랑하느냐?” 혹은 “너는 내가 받을 만큼의 사랑을 하고 있느냐?” 묻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이미 한참 못미치는 내 사랑의 수준을 이미 아신다. 주님께서는 “최고의 수준이든, 가장 수준이하이든지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물으신다. 나의 대답은 “네 주님,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잖아요. 주님께서는 그러셨죠? 적게 사함받은 자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람 받은 자가 더 사랑한다구요. 최상의 수준은 아니지만 제가 받은 죄사함의 얼마나 큰지, 받은 은혜의 크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내게 주님께서는 “(사랑한다면) 기억해라. 네게 맡겨진 이들이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임을 알고 ‘내’ 양을 돌보고 먹이라”고 하신다.
사역의 목표가 사역 자체가 되면 잘못 짚은 것이다. 애초에 외국인 나그네들을 사랑할 수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나를 부르셨다. 내 평생의 목표, 사역의 성공의 척도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는가, 얼마나 교회가 더 자립을 하게 되었는가, 얼마나 더 감동적인 설교와 강의를 하는가가 아니다. 비록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달라서 공동체로 동고동락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나그네 사역의 첫발을 내딛던 그 때 그분의 사랑이 나를 강권(control)하셨기에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반응했던 사랑이 처음보다, 10년 전보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이, 날이 갈수록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져가는 것이 사역의 목표와 척도가 되어야한다.
돌아보니 나를 외국인 나그네 사역으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사역’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르셨다. 레위기 19장에서 언약백성 모두를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시는 주님께서는 ‘거룩’을 모든 규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율법의 요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2:37-40). 곧 ‘사랑’하는 것이 ‘거룩’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33-34절).”하시며 나그네 사랑을 통해 주님 사랑 곧 거룩을 이루어가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한다고 그에게 저주하는 말을 하거나,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지 못한다고 그를 넘어뜨리는 장애물을 그 앞에 놓지 마라. 다만 너는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여호와다.”(14절)하시며 장애인 사랑을 말씀하시며 유위를 향한 돌봄과 사랑이 사랑의 거룩, 성화임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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