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16

노동과 예배

노동과 예배 이사장 정현구 목사 일과 예배는 반대일 것 같은데 성경은 주중의 일과 주일의 예배를 서로 연결된 것으로 봅니다. 일상의 일이 곧 예배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예 일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은 일하는 목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란 최초의 집을 만드신 목수였다면, 예수님은 부서진 집을 고치는 목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식물과 짐승들처럼 " 충만하고 번성하라 " 라고 했지만, 이에 더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는 일도 주어졌습니다. 그 일과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주어진 저주가 아니라 인간 창조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인간은 일하지 않으므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행복하도록 창조..

그래도 희망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정현구 대표)

우리는 세계와 우리 나라 경제가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낼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합니다. 실제로 모든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힘들게 하는 것은 물가뿐이 아닙니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깊어만 가는데 장기적인 대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직장을 못 구하기에 결혼이나 출산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할 사람이 없어 고심하고 있는 분야가 많이 있다 합니다. 작년에는 농어촌 일손 부족을 해결하고자 외국인 유학생을 동원하자는 방안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인이 일하려 하지 않는 직종에는 우리보다 개발이 늦은 국가의 외국인을 한시적으로 고용하자는 방안으로 시작된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시행된 지 어느덧 20살 성년이 되..

나그네 영접은 그리스도인의 임무

손봉호 (사)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명예 이사장, 희년선교회 전 이사) ‘은둔자의 나라’로 알려졌던 한국에 외국 노동자, 기술자, 유학생, 난민이 찾아오고 다문화 가정이 생겨나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외국인이 전체인구의 5% 이상이면 다문화 사회라는데 한국에는 이미 거의 7%나 되고, 국민 60%가 한국은 다문화 사회란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후진국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민 가는 나라에서 이민 오는 나라로 발전한 것은 충분히 자축할만하다. 그러나 한국인 대부분은 아직도 나그네들을 제대로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직도 외국인들을 ‘우리’의 태두리 안으로 품는 것에 어색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외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기업인들이 없..

대표 2021.12.19

희년선교회가 나아갈 방향 (이만열 )

1. 희년선교회의 이념 희년 (禧年 Year of Jubilee)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그 다음 해에 맞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의 해'이다. 희년에 대해서는 구약 레위기 25장과 27장에 잘 나타나 있다. 레위기 25 장10절은 희년 정신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너희는 50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희년은 자유의 해로서 종을 놓아주며, 그 동안 가난 등으로 팔았거나 전당 잡았던 토지를 돌려받는 해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해를 맞아 그들이 원래 유산받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종에서 놓임을 받아 가족에..

한국선교역사와 희년선교회 (이만열 )

한국 선교의 역사를 훑어보면, 1832년 독일 할레 대학 출신이며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인 귀츨라프(Guetzlaff) 목사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부탁으로 중국과 한국과 일본을 순방할 계획을 가졌다. 또한 로버트 모리슨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던 성경을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전달해 주었다. 1865년 6월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는 1860년에 중국 상해에 선교사로 갔다. 그러나 아내가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고 전임자와의 불화로 선교사를 사임하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알렉산더 윌리암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 백령도 지역에서 3개월간 한글을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1866) 그는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평양에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인정되기도 하..

외국인근로자를 섬기는 이유 (이만열)

비 때문에 질척거리던 지난 8월 11일 오후, 내가 돕고 있던 희년선교(의료공제)회에 몇몇 일본 손님이 왔다. 릿쿄(立敎) 대학 산본마츠(三本松) 교수를 단장으로 한 일행 9명이었다. 이들은 문부과학성 소관의 일본학술진흥회에서 연구비를 받아,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의 생활 실태와 복지 지원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고, 2009년부터 향후 5년 동안은 “이주생활자의 생활 지원과 이민정책의 복지 과제에 관한 한일 비교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한국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회의에 앞서 나는 인사말을 겸해 이들에게 내가 섬기고 있는 희년선교회의 설립 동기와 그동안의 경과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전파를 타게 되자, 한국의 발전상을 알게 ..

예수를 믿음으로써 불편해지는게 더 많다 (이만열)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다니기 시작한 교회가 속한 고신교단을 지금까지 벗어난 적이 없다. 고신교단은 일제하 신사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해온 교단이다. 그 저항에 민족정신이 함께 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순교정신의 발로는 한치도 타협할 수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이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보수적인 신앙인, 즉 복음주의권 목사들과 원로들에게 흔히 풍기는 배타성이나 외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오늘 먹을 것이 떨어져도 기개만은 잊지 않았던 딸깍발이 선비 처럼 초심을 잃지않은 내적 강인함 속에서도 강자보다는 약자들 쪽에 귀를 열어두는 연민의 마음이다.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역사’ 강의 숙명여대 한국사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위..

많이 나누는 사람이 참부자 (이만열)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가 선택하는 단어는 평범했다. 말맺음은 겸손했고 내용은 따뜻했다. 그래서 희년선교회 대표로 17년째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봉사활동을 해 온 이만열(71) 숙명여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복음을 전해 듣는 듯했다. 그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을 봉사의 원칙으로 삼았다. 당연히 그의 선행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작은 규모로 일을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심으로 감동해 그 향기가 퍼져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28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자택에서 이 대표가 직접 끓여 준 향 깊은 홍차를 마시며 희년선교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제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1993년 2월 귀국했는데 그해 3월 희년선교회..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이만열)

2002년 11월,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희망의 닻을 올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2008년 정기총회를 갖는 이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교회 개혁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하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며 또 가시적인 성과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전망의 어두움 등을 고려한다면 눈물 흘리고 낙심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이 운동의 필요를 아시고 이날까지 이끌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용기주심에 거듭 감사하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19세기 말에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한국 수용과 함께 성립됐습니다. 그 동안 한말의 고난과 일제하의 역경, ..

새로운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만열)

대통령께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중국 등을 통하지 않고 이 길로 가는 것. 이게 통일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육로로 간 것은 통일문제에 바람직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그 길이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내려왔던 길이고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올라간 길이며 6·25때는 남침한 길이고 또 북진한 길이다. 대통령이 평화 문제로 그 길로 간 것은 획기적인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고 했다. 이번 진행과정을 보며 남북관계에서 우리 사회가 많이 투명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같으면 교섭의 전 과정이 투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에 보여준 투명성이라는 것은 남북관계에서 개재할 수도 있는 장애물을 한 단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