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 럼/이만열 (초대 대표, 1993.6~2020.2)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은 삶 (이만열)

희년선교회 2021. 7. 18. 13:20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 11-12)

 

 

  내가 어릴 때에 읽은 책 가운데,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 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이 있습니다. 기독도(크리스챤)가 장차 망할 장망성(將亡城)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입니다. 기독도는 그 과정에서 많은 시련과 유혹을 받아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데에 승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이 나그네 즉 순례자(巡禮者)의 생활이라는 것과 이런 순례자의 길이 어때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것은 ‘거류민과 나그네’의 생활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류민은 자기 고향이나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족을 떠나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낯선 곳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 곳에서는 정을 붙여 살수도 없고 뿌리를 내리고 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그네는 여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한 곳에서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으며 늘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사도가 쓴 것입니다. 그는 우리 크리스도인들을 향해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사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빌 3:20).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에 등록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거류민이나 여행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나 여행하고 있는 곳을 자기 나라로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이 우리에게 영원한 시민권을 줄 그런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돌아갈 우리의 본향(本鄕)인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를 늘 사모하면서 그 나라의 시민권자답게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 곳에 계시는 여러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에 와 있지만 늘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나도 20여년 전 외국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국의 군부정권은 내가 봉직했던 대학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죄인처럼 대학에서 쫓겨났고 그런 아픔 속에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직업을 박탈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한국에 와서 한 번이라도 해직(解職)의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해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요구하는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한국의 군부정권으로부터 해직된 교수가 왔다고 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국에서 보낸 거류민, 나그네 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생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한국에서 나그네이듯이 나도 한 때 미국에서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 같이 나그네를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런 나그네의 공통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땅(지구) 자체에 대해서 나그네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거류민이요 나그네이면서, 하늘의 시민권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나그네의 길을 가는 순례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거류민이나 나그네는 그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조국과 가족을 떠나 이 이국땅에 와서 잠시 거류하게 되었다면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고 있는 나그네도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류민이나 나그네가 왜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가, 내가 다음에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분명할 때 거류민의 신세를 빨리 청산할 수 있습니다. 그 목표가 확실할 때 여행길에서 혼선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나그네의 길이 바른 것인가, 내가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흉흉한 파도가 일고 폭풍우가 부는 캄캄한 밤이라고 할지라도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아가면 그 배는 목적지를 향해 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침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를 모시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간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으면 우리의 여행길이 어긋나거나 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그 여행짐(行李)이 간단해야 합니다. 거류민이 되어 산다는 것은 이사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또한 집을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 짐을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잘 하는 사람은 갖고 다니는 짐을 아주 간단하게 합니다. 짐이 많으면 들고 다니느라 여행 자체가 즐겁지 않습니다. 나도 여행을 많이 합니다만 그 여행에서 터득한 것은 어떻게 하면 여행가방을 줄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성자같은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라고 합니다. 그는 일찍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등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때문에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여행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를 잘 아는 분은 그의 여행 가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단했다고 합니다. 그는 수많은 여행을 통해서 여행의 요령을 잘 터득했습니다. 여러분의 여행짐은 어떻습니까.

  거류민과 나그네는 그 여행짐이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요, 언젠가는 나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행짐을 간단하게 합니다. 여행짐이 복잡한 분은 아예 이 세상에 살기로 작정한 분입니다. 그들은 거류민이나 나그네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여행짐을 어떻게 줄이려고 합니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의 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 2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거류민으로 또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시는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아가 내가 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앞에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행길에는 좋은 동행이 필요합니다. 좋은 동행자가 있으면 아무리 먼 길이라고 할지라도 즐겁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적지에 간다고 할지라도 동행자가 좋지 않으면 그 여행은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동행자에 따라서는 험난한 여행길도 즐거울 수 있고 또 즐거워야 할 길이 아주 힘든 고통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여행시간 또한 상대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애인과 함께 즐기는 여행길은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원수와 함께 하는 짧은 여행길보다도 짧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거류민 생활에서는 누구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나그네 길에는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 동행자가 예수 그리스도일 때에 여러분의 거류민 생활과 나그네 생활은 안전과 즐거움이 동반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필요와 어려움을 고루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동행길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대신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러분들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나그네는 여행길에서 지켜야 할 수칙(守則)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시민인 우리들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일러주는 수칙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11절). 육체적인 정욕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는 먹는 것과 듣는 것, 보는 것 등 인간의 육체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것은 섹스 문제입니다. 섹스를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행한 이 명령과 같은 교훈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왜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까. 집을 떠난 나그네는 모두가 낯선 곳이기 때문에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함부로 방종한 상태로 두기 쉽습니다. 아무리 낯설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육체적인 정욕으로 이끄는 유혹은 쉽게 물들기 쉽습니다. 나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고향에 배우자를 두고도 이 곳에서 쉽게 육체적인 유혹에 물드는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섹스는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 번 유혹되면 끊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류민과 나그네 된 자들은 이 육체적인 정욕에서 자기를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절제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갈 5: 23).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수칙 한가지를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낯선 이 땅은 곧 이방입니다. 주변에는 이방인 즉 외국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지 악을 행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외국인인 내가 선이나 악을 행한다고 하여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두 번은 모른다 하더라도 계속되는 선과 악은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곧 드러나고 맙니다. 한 두 번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여러 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한 두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만인은 속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행하는 선행과 악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행과 악행을 곧 드러나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와 여러분의 행위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모든 행위는 드러난다고 봐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류민이요 나그네된 우리가 선행을 행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2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 16)”.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제 1문은 사람의 제1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그네된 사람들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 나그네들의 선한 행실이 바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땅에 나그네로 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파송한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오신 여러분 나그네 된 형제 자매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한국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온 근로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파송하신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외국에서 오신 형제 자매님들이여, 여러분들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온 근로자들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에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지마는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이 곳에 파견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의지로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파송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착한 행실을 한국인에게 보여드리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외국에 거류민이나 나그네가 되어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여러 선배들이 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남성다운 미모를 보고 이집트 고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여 완강하게 육체의 정욕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여성으로부터 모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행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집트를 다스리는 제 2인자의 위치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현재 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위치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일에 힘씀으로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집트로 파송한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BC 600년경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포로로 잡혀가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운 운명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빌론 궁중에 있으면서 이방 문화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생활을 원했습니다. 포로의 신세에서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 사람들의 문화에 뒤섞이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 할 인격과 행실을 원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나라에서 제 2인자의 직위에까지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가 포로라는 외국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외국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이 땅에서는 거류민이요, 나그네입니다. 이 곳이 영원한 본향이 아닙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이 목적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여행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같이 걸어줄 좋은 동행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 동행자가 있을 때 아무리 괴롭고 먼길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통해 사도 베드로는 거류민과 나그네에게 필요한 행동수칙을 말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또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선한 행실을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공적인 거류민, 나그네가 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런 노력을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격려하고 돕는 기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2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