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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선교 역사

희년선교회 2024. 9. 23. 20:52

베트남 선교역사

 

 

기독교가 베트남에 전해진 것은 10세기경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무역상, 선원, 외국군인들 가운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베트남에 들어왔으나 이를 공식적인 복음 전파로 보기는 어렵다.

 

1) 베트남복음성회(Hoi Thanh Tin Lanh Vietnam)

 

1984, 프랑스선교회가 첫 목사를 하이퐁에 보냈는데 아쉽게도 단지 프랑스인을 위한 목회자로 보냈고, 그 당시 성서공회의 부분적인 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구미 각 교회의 대 부흥운동 이후 선교운동이 극에 다다르고 많은 선교회가 조직되었을 때, 심프슨 목사에 의해 복음선교연합회(CMA)가 설립되었고 CMA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관심을 갖고 베트남에 복음을 전할 방법을 모색했었다.

 

-1911 : R.A.Jaffray, P.M.Hosler, Hughes선교사 다낭에 선교사무실 건축을 위한 부동산 매입.

 

(1) 1911-1918

언어공부를 마친 후 선교사들은 베트남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는데 몇 명의 선교사가 추방되었다는 이유로 인해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불신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회들을 각 지방에 설립하였다.

 

(2) 1918-1927

이 기간에는 베트남 목사, 전도사들의 양성을 위한 최초 성경공부반이 1919년 마굿간에서 시작되었고, 짚으로 만든 최초의 예배당이 다낭에 세워지고, 1921년 다낭 성경학교가 설립되었다.

 

(3) 1927-1942

이 시기부터 교회는 행정과 함께 자립을 하게 되었다. 1924-1926년까지 제1,2,3회 총회가 다낭에서 시행되었고, 1927년 최초의 행정회의(총회 순서로는 4번째)가 다낭에서 모여 첫 회기 임원회가 시작되었다.

 

(4) 1942-1954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베트남 복음성회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교통은 두절되었고, 북쪽은 기근을 당하고, 선교사들은 투옥 당하고, 신도는 흩어지고, 성경학교는 중단되고(1944-1948), 예배당들은 문을 닫고, 사악한 이론들이 나타나서 교회의 자치 자립의 기운이 다 소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영향은 계속 되었지만, 신도 수는 여전히 증가하고, 교회는 회복되고 주를 믿는 사람 수는 평상시보다 증가했으며 몇개의 예배당은 재건되었다.

 

(5) 1954-1975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짐에 따라 교회도 북부 총회와 남부 총회로 분립됨. 1954년 이전에는 북지방회, 중지방회, 남지방회 등 3개 지방회가 있었고, 남부 총회에서 중지방회와 남지방회 2개로 나누었다. 1960년부터 상지방회(Thuong Hat-주로 소수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중서부 고원지대)가 추가로 나누어 짐. 1960년 다낭 성경학교가 냐짱으로 이전, 성경신학원으로 승격했다. 1962년 중지방회가 둘로 분립되었고(북중지방회, 남중지방회) 라오스에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966년 사이공의 공화운동장에서 복음전도대운동이 열렸고, 이 때부터 다양한 방법의 전도방법이 사용되었다(방송선교, 차량선교, 사회 구제사역 등)

 

(6) 1975-2001

1975년 공산화 이후 각 교회의 전도활동이 교회 내 모임 안에서만 이루어졌으나 신자의 수는 증가했다. 1976년 제42차 총회가 호치민시에서 열렸고, 1990년대는 많은 교회가 증축되거나 새로 세워졌으며, 94-2000년까지 정부가 신구약 65,000, 신약85,000, 찬송가 25,000, 복음서적 80,000, 성경 120,000권 인쇄를 허가함. 2001 3 16일 정부 종교성 규정에 의해서 베트남 복음성회(남부)가 종교 법인체로서의 자격을 얻음으로써 제1회 베트남 복음성회(남부) 총회에서 통과된 헌장에 의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베트남침례교회(Hoi Thanh Bap Tit Vietnam)

 

남침례교 해외선교회(Southern Baptist Overseas) 1959년에 베트남에 입국하여 개신교 선교에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 1958 10월 베트남에 선교센터를 세우기로 결정하여 1959 11월 하이스(H. P. Hayes) 목사 부부가 베트남에 입국하여 사이공(Saigon), 달랏(Da Lat), 냐짱(Nha Trang), 다낭(Da Nang) 등지에서 신학교를 설립하거나, 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전개하였다.

 

 

3) 베트남기독전도회(Hoi Truyen Giao Co Doc Vietnam)

 

베트남기독전도회는 국제 선교단체인 ‘W.E.C.(World Evangelization for Christ, 초기에는 ’for Crusade'를 사용했음)이 베트남에 세운 전도회로, 1957년 초 첫 선교사 스미스(G. H. Smith)목사 부부가 베트남의 다낭에 기독전도회의 선교센터를 세우고, 이어 선교사 파송과 함께 이 지역의 미전도 종족인 꾸어, 흐레이, 빠코, 브루족에서 사역을 감당할 종족 지도자 훈련원인 성경학교를 세웠다. 이들을 통해 예족 20,000, 세당족 40,000, 바나르족 20,000명 바나르-참족 10,000, 릉아오족 10,000명 등에게 복음을 제시하였다. 자체 자료에 따르면 현재 사역 중인 교역자(목사, 전도사)는 총 77명이다.

 

 

4) 프랑스 개신교회

프랑스 개신교회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개신교 선교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1886년 베트남에서 군목으로 사역했던 개신교회의 보이셋(T. Boisset) 목사는 프랑스 개신교회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도록 개신교 선교의 시급성을 편지로 보냈고, 프랑스 개신교회의 정기 간행물인 생활과 신앙(Foi et Vie)' 1906 11월 호에 당시 하노이교회에서 사역했던 리치몬드(A. de. Richmond) 목사는 인도차이나 선교에 대해 (1)이 민족은 15세기 동안 문명화된 민족이므로 선교를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2)선교 지역을 선택할 때, 로마 카톨릭의 활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그들을 개신교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키는데 힘쓸 것이며, 그들의 종교를 바꾸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세가지를 발표했다.

 

(1) 1927년 이전

1884년 프랑스의 식민지복음전도회에서 파견한 고클레어(Gockler) 목사가 하이퐁(Hai Phong)에 와서 인도차이나 최초의 개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군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 개신교인만 참여하였다. 1921 10 23일 프랑스에서 3인의 선교사에 의해 인도차이나개신교연구회가 조직되고, 이들은 그 다음 해 1월에 하노이에 도착했다. 1922 3월 초에는 그들 중 하나인 모넷(P. Monet) 인도차이나와 복음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동시에 학생회관을 세워 운영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소울리어(U. Soulier)에게 인계하였다.

 

(2) 1927년 이후

전쟁과 베트남 정치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베트남의 프랑스 개신교회는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1957 9월 루즈(B. de Luze) 목사가 사이공에 도착하여 사이공교회에서 사역하며 달랏교회를 개척하여 프랑스어로 신도를 가르쳤다.

 

 

5) 영국성서공회

 

영국성서공회는 일찍부터 중국 화남(華南)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당시 인도차이나인 베트남에 들어와 사역했다.

 

(1) 중국어 성경 배포

1895년부터 중국 화남 지방에서 사역 중인 선교사를 사이공으로 보내 중국어 성경 배포를 시작케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공회에서는 1902년 심도있는 토론을 거쳐 보넷(Bonnet)을 다낭에 파송하였다.

 

(2)다낭 선교센터

보넷은 다낭에서 중국어 성경을 인쇄하였고 최소한 세 명(Phan Dinh An 2)의 종교 서적 상인을 통해 1911년까지 베트남인들에게 한자어나 쯔놈(chu nom, 이두 문자 계통)으로 번역한 신약 성경과 쪽 복음을 팔거나 배포하였다. 아울러 보넷 응웬 반픅의 통역을 통하여 주변 베트남인에게 간단한 설교(복음 제시)도 하였다.

 

(3) CMA와의 협력

성경 번역과 배포를 지속적인 사역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11 CMA에서 세 명의 선교사가 베트남에 입국하자 다낭 선교센터를 CMA 선교회에 저렴한 가격으로 양도하였다.

 

 

6) 메노나이트 선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1954,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의 국토가 양분되고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이들의 구호와 의료 사역을 중심으로 선교하려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베트남에 입국했는데, 이 중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메노나이트 선교회다.

 

(1) 중앙구제위원회 설립

 

1954년에 메노나이트 중앙구제위원회를 베트남에 설립하였는데, 이는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온 이재민들에게 현물, 현금과 봉사를 통한 의료 활동을 펼치고자 함이었다. 이들에게 의사와 간호사, 약사를 파견하였으며, 중부 고원 지대인 반메툭의 복음나병센터와 협력하였다. 크라빌(W. Krabill)부부는 베트남에 파송한 첫 의료 선교사였다. 이를 시작으로 선교회는 베트남복음성회, CMA와 함께 각 지역에서 사회 사업 및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에 스타퍼(J. K. Stauffer) 목사 부부가, 그 해 말에 메츨러(E. G. Metzler) 목사 부부가 선교사로 베트남에 들어왔다.

 

(2) 1960년 이전

1957년 협력하던 반메투옥의 복음나병센터는 주 사역자인 딕(J. B. Dick)과 그의 가족, 웨버(E.Weaver), 호츠텔러(A. Hochsteler) 등이 냐쨩으로 옮기는 이유로 문을 닫았다. 그들은 냐쨩에 도착해 베트남복음성회와 긴밀한 협력 가운데 의료 사역을 시작하였다. 1959년 병원설립위원회는 4명의 베트남인 목사와 1명의 선교사 의사로 조직되었고, 병원 건축과 운영 경비는 선교회에서 부담하였고 베트남복음성회에서는 부지를 제공했다.

 

(3) 1960년 이후 사역

1960년 베트남복음성회와 협력하여 냐쨩복음병원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의료 사역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014일부터 이동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인근 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였다. 1963년에는 25개의 병상을 확보하였으며, 월 평균 환자는 약 3,000명이었다. 매일 오전 9시마다 전 환자를 대상으로 예배하는 등 많은 개종자가 있었다.

 

1964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rch Committee)의 지원으로 건물을 확장하여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었는데, 연간 총 3,600명의 환자 중 입원은 650(이중 외래는 하루에 150) 정도였다. 또한, 병원 원목제도가 시작되어 레칵짠(Le Khac Chanh) 목사가 전담했다.

 

1966-67년에 베트남기독봉사회가 조직되었다. 이는 미국의 사회사업 단체인 C.W.S.(Church World Service) L.W.R.(Lutheran World Relief) 및 선교회의 후원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베트남복음성회에서 파견한 쯩반상(Truong Van Sang) 목사는 선교회 의사들과 함께 사역했는데, 이는 베트남기독봉사회와 베트남복음성회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4) 사이공 선교센터

1964 9월 사이공에 첫 선교센터를 설립하였고, 두 번째 선교센터는 쟈딘(Gia Dinh)에 설립하였다. 이 곳에서 19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주일 예배와 기도회를 가졌다. 선교사들은 주로 사이공과 쟈딘의 청년 학생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는데, 문화 활동을 통하여 교회로 인도했고,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를 운영하여 여름방학이 되면 여름성경학교를 조직하여 전도와 양육을 하였다. 또한 학생을 베트남복음성회의 총회신학원에 위탁 교육하였고 영어 방송을 통하여 전도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7) 한국 교회

 

베트남 교회의 개신교 선교역사 중에는 한국 교회의 역할도 있었다. 한국 교회가 베트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4년 국군을 파병하면서부터 군목과 군종을 통해 베트남 교회 또는 소수 민족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구제와 봉사, 선교가 시작되었다.

 

(1) 장로교 통합 선교부

1970 1월 전쟁으로 얼룩진 베트남에 여전도회의 후원으로 박성준 선교사가 사역하였다. 1972 7월 박선교사가 보낸 선교활동 상황보고에 따르면 베트남인 교회에서의 설교와 가정 방문, 문서 전도, 피난민 수용소 방문 등을 통해 사역하였으며, 상당히 고무적인 결실을 거두었다.

 

(2) 장로교 합동 선교부

1969 3월 베트남복음성회의 신학생인 응웬쑨바오(Nguyen Xuan Bao)를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에 입학시켜 약 3년 간 후원으로 유학을 한 바오 전도사는 월남으로 돌아가서 곧바로 장로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설립된 23개의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총회 조직 및 총회 신학교를 운영하였었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어 모진 핍박을 견디던 바오 목사는 아들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탈출한 후 미국에 안착하였다.

 

(3) 기하성 선교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서도 베트남 전쟁 기간 중 김남수목사를 베트남 선교사로 파송하여 주로 중부 고원지대인 달랏에서 사역을 했다.

 

(4) 한국세계교회협의회(K.W.C.C.)

한국세계교회협의회는 감리교 목사인 신원균 선교사를 베트남에 파송하였다. 이는 초교파적인 협력 사역으로 베트남 복구와 구제 차원의 선교 사역이었다. 당시 휴전이 성립된 베트남을 위하여 세계 교회들은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인도차이나 재건 및 화해 기금을 만들었으며, 1973 2월초 9톤에 달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신선교사를 통해 베트남에 전달했다.

 

(5) 베트남선교회

베트남선교회는 1970년 기독교장로회 소속인 김상우목사를 베트남 선교사로 파송, 사이공한인교회의 담임 목사로 사역하게 하였다. 강원균목사도 베트남선교회의 파송 선교사로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사역했다.

 

 

8. 현지교회 동향

 

1) 베트남 공인교회 현황

공산화 직후 정부에 의해 교회의 폐쇄, 목회자의 투옥, 불법 종교 집회의 차단 등으로 교회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나 기존 교회를 중심으로 계속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집회허가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인교회다. 공인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처나 나중에 생겨 허가를 받지 못한 교회를 처소교회라 부른다. 또한 정부 정책상 대부분의 소수부족 교회를 허가해 주지 않았는데 이런 교회들도 처소교회라 부르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2001년 개신교단의 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종교법인으로서의 등록해 줌으로 남부 베트남복음성회라는 총회가 공식적으로 출범되었고, 교회 대표들이 투표로 선출한 임원들에게 대표권을 주었다. 공인교회의 모든 종교활동은 교회 내에 국한된다. 따라서 교회 밖 전도활동이나 예배활동은 금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일상적인 종교활동은 연례적인 보고서를 통해 허가되지만 교회별 모임이나 비정기적인 특별한 행사는 반드시 허가를 얻어야 운영될 수 있다.

 

1) 조직

베트남 공인교회는 교회운영위원회(Ban Tri Su)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당회 역할을 하는 교회 운영위원회는 담임목사, 서기, 회계, 위원 등으로 구성이 되는데 이들은 집사회에서 선출된다. 집사회의 구성은 교인들에 의해 매년 투표로 선출된다. 자격은 28세 이상된 세례교인 중 교인의 과반수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 하며 임기는 2년이다. 2년 후 계속 표를 얻을 경우 연임할 수 있고 집사회의 인원은 교회 규모에 따라 정해져 있다. 도시의 큰 교회는 대략 16-24명이고 작은 교회나 지방의 경우는 8-16명으로 구성된다.

 

(2) 모임

예배 모임은 주일예배와 주중 모임을 갖는다.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주일에는 새벽 530, 오전 830, 오후 7(혹은 5)  3차례 모인다. 각 부서별 모임은 주일 혹은 주중에 있다. 주일학교는 유치부 유년부 청소년부 청년부 장년부 등으로 나누어 운영 되는데 주일예배 전에 성경공부 시간이 있고 주중에 부서별 모임을 갖는다.

 

(3) 교회 현황

현지자료에 의하면 공산화 전 신도수는 10만명 이었고, 공인 교회 성도 수는 7십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150만명의 소수부족 성도를 합한다면 전체 220만명 정도라 추정한다. 교역자는 공산화 이후 신학교가 폐쇄되어 그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 받은 목사나, 신학교 과정을 수료했으나 안수를 받지 못한 전도사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200129일 복음 총회가 열리고 총회가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총회 결의로 신학과정을 수료한 158명의 전도사들이 2001 5월 첫째주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4) 교회 수

베트남 교회의 여건상 정확한 통계를 갖는 것은 쉽지가 않다. 집회를 허락 받은 공인교회와 교회가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처소교회, 기존교회와 상관없이 비밀리에 모이는 처소교회 및 가정교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인받은 교단인 베트남복음성회에 속한 교회는 총 625개이나 이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북부 15, 남부193, 교역자 없는 교회가 65개로 총 273개 교회가 있다. 그리고 공산화 이후 문이 닫힌 교회 287개처, 빼앗긴 교회(타용도로 사용중) 65개처로 352개의 교회가 폐쇄된 채 남아있다.

 

(5) 베트남 복음 성회의 과제

총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신학교 입학자원 확보, 교역자 수급, 폐쇄된 교회 및 처소교회 등의 교회 복원 및 인가 획득 문제, 성경 찬송 등 기독출판물의 수량제한 철페 문제, 은퇴 교역자 및 미망인 사모를 위한 생활관 제공 문제 등이다.

 

 

) 비공인교회

가정교회 혹은 지하교회라 부르는 비공인 교회의 태동은 공산화 이후로서 그 모체는 공인 교회였다. 베트남이 공산화 된 이후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상범, 혹은 정치범이라는 죄목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정신개조훈련을 받았고 전도활동과 선교사역을 하던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 되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활동들은 감시와 조사의 대상이 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교회적인 상황이 가정교회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기존 교회에서 뜨겁게 기도하던 성도들이 교회에서 마음껏 기도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게 되자 소그룹별로 가정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가정교회 지도자는 “80년대초 뜻이 있는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에서 뜨겁게 기도하던 중에 방언을 하는 등 신비스런 현상들을 경험하는데 교회에서 그것을 제재하게 되고 처벌을 가하게 되니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가정교회의 대부분은 오순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공인교회에서 예배드리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떨어져서 거주하는 성도들을 위해 공인교회에서 처소를 거주지역 가까운 곳에 마련해서 생긴 처소 교회도 있다.

 

외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활동하던 가정교회의 활동이 표면화 된 것은 1987년 베트남식 페레스트로이카로 알려진 도이머이라는 신 경제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다. 베트남의 문호개방으로 외국인들과 해외거주 베트남인(Viet kieu)들이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그 실상이 세계인권단체들과 교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1)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 (1975 4월 이전)

베트남 오순절 교단은 CMA나 기독전도회, 침례교단등 기타 여러 교단보다 훨씬 늦게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도 베트남에서 30년간의 남북전쟁 말기인 70년대초에 시작을 했고 전쟁 후에는 그나마 공산화의 시련으로 인해 오순절교회는 베트남 교회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오순절 교단은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 여전히 성장해 가고 있다. 오순절 교단의 가정교회는 20여개가 넘는 군소 교파들이 있다. 크게는 200여개의 처소교회를 치리하고 있는 교단이 있는가 하면 2-3개 혹은 5-6개의 처소교회를 치리하면서 독립교단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교회들도 있다. 이 중에 베트남 가정교회와 오순절 교단의 뿌리이며 세계오순절교단에 가입해 있는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를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에서 발간한 소책자의 번역을 통해 살펴본다.

 

1970년초에 성령은 Don Warren부부로 하여금 붕따우에 여행을 하도록 인도했고, 그곳을 여행하는 동안 미국인이 낳아서 버리고 간 많은 아이들을 본 후 Warren은 탁아소를 세우기로 결정을 하고 어린아이들을 품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Warren부부는 예배당을 지었고 호기심으로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 수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천주교 오순절 운동의 기둥들이 되었다. 이 예배당에서 일어난 은사주의 운동은 남부지역의 각성과 시로 번져갔고, 그 즈음 필리핀 목사(Gioen, Luciano, Peter, Ceicel, Sony, Josep)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2) 베트남 오순절 복음교회의 형성

산발적인 성령의 임재는 3년이 지난 후, 1973 6 23일 사이공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베트남 오순절 복음교회는 정부법률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교회성장의 행진은 중단되었고, 교회는 공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CMA에 병합되어야 했다.

 

3)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 (1975 4 30일 이후)

1975년 이후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는 마치 소멸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88년 많은 성도들에게 성령 세례가 임했다. 그리고 막 시작된 성령의 불길을 꺼버리기 위한 기존 교단과 정부로부터 차별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단지 새 방언을 말하는 은사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여러 은사를 받아 실행하였는데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축사의 은사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담대하게 멀고 위험한 외딴 벽촌들을 두루 다니면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완전한 복음을 전파하였다.

 

날이 갈수록 교회가 성장하여 사역자들이 부족하게 되었고, 지도자에 대한 훈련이 급박하게 되었다. 그래서 1989 6월에 제1여호수아 과정(GIOSUE)을 열어 전국에서 25명이 모여서 훈련을 받았고, 그해 9월 두 배로 증가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시 제2여호수아 과정(GIOSUE)을 개강하게 되었다. 베트남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는 Thomas Trask가 총재로 있는 140여개국 소속 국제 오순절 하나님의 복음성회 공동연합의 정식회원이다. 2001년 베트남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는 약 만9천명 성도와, 2백여개의 지회, 9개의 지방회를 갖게 되었고, 갈렙(CALEP)과정 53 1,250, 여호수아(GIOSUE)과정 45 665, 안드레(ANDRE)과정 700여 차례, 목사를 위한 과정으로 모세,(MOISE,) 미래 지도자 후보생들을 위한 아론(ARON)과정이 개설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35명의 목사(25명의 임직목사, 10명의 비임직목사), 50명의 순회전도자를 포함한 2백명의 처소장이 예비되었다.

 

4) 가정교회의 과제와 전망

가정교회의 문제점은 신학적인 면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정교회뿐만 아니라 공인교회도 공히 가지고 있는 문제다. 많은 신학교가 있음에도 공식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교역자를 양성하는 가정교회의 신학교는 없다. 전국에 약 1만개 이상의 소그룹을 가지고 있는 가정교회의 현실 속에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문제는 매우 시급하다고 하겠다.

 

지금은 많은 해외선교단체 신학과정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있다. 예를 들면 ICI (International Correspondence Institute) BEE(Bible Education Extention), TEE (Theological Education Extention), GBI(Global Bible Institute), International Harvest Course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과정을 마쳐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가정교회 목사들은 모두 공인교회 출신이거나 외국의 선교기관으로부터 안수를 받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안수를 받지 못하고 목회하고 있는 가정교회 리더들을 성도들이 목사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앞으로 이 문제가 교역자에 대한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선교사들의 중복투자로 인한 문제점들이다. 각국의 수많은 선교기관들과 교단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현지 교단이나 선교회와 협력을 빌미로 좋은 조건에 교단을 바꿀 것을 흥정하는 경우도 있다.

 

 

(출처 :   임도마 선교사의  선교타임즈 원고 '선교사가 본  사역지 나라의 어제와 오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