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 럼/이문식

성전(聖戰)은 없다 (이문식)

희년선교회 2021. 9. 9. 20:30

16:17-20절에서 사도바울은 분쟁을 일으키는 자에게서 떠나라고 하며 저들은 자신의 배(이익)를 섬기고, 우리를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고 한다. 성경에는 도처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구약성경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성경이 말하는 전쟁에 대해 정리하지 않으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세계도 마찬가지다. 1,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거나 진행 중이다. 성경과 현실에 만연한 전쟁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전(聖戰, Holy War)은 없다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신약시대 기독인들에게 성전(聖戰)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1095년 종교회의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전을 선포하며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신학적, 역사적 오류였다. 신약시대에는 어떤 이유에서도 전쟁을 성전이라는 용어로 미화한 적이 없다.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성전은 신약에서 현실적 전쟁으로 실현된 적도, 될 수도 없다. 구약성경에도 성전이라는 용어는 없다. 폰 라드(von Rad)라는 구약학자가 성전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대부분 학자는 잘못된 용어라고 지적한다.

 

여호수아의 전쟁 등은 성전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면 소위 구약의 성전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전쟁은 무엇인가? 첫째는 내용이 대단히 구속사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구약시대에는 신정정치 형태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국가와의 전쟁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국가가 아닌 교회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교회는 어떤 공권력, 군대, 폭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만 보아도 신약 교회가 전쟁을 수행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구약의 전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전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의 전쟁은 예배 행위와 밀접하다. 전쟁이 나기 전에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등 전쟁 선지자들이 불림을 받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군사로 모집하는데 이때 칼과 창의 성격이 아닌 신앙적으로 헌신된 자들을 모으는 특징이 있다.

 

또 전투를 위한 상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으로 모이라고 할 때 신앙적인 이유로 모인 것이다. 사울의 군주제와 다윗 시대를 지나며 비로소 상비 전투병이 생겨났다. 이때 상비군도 왕실 친위대 형태, 장교 중심, 장수 중심이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군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군대 숫자를 중시하지 않았다. 헌신도를 중시하였다. 종교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셋째, 병사들은 3일 이상 정결례를 행하고 성결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여호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다. 전투력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요청한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회의를 통한 전략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전쟁방식이 제사와 유사하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나가고 레위인들이 뒤를 따르며 빙빙 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그로 말미암아 적들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며 뒤쫓아 수습하는 역할을 한다. 15장에서는 '여호와는 전사(장수)이시다'라고 표현한다.

 

다섯째, 하나님이 임하신 표적이 나타난다. 신적 공포가 적들에게 나타난다. 적들이 전쟁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기드온 전쟁에서도, 다윗이 전쟁 시 위에서 뽕나무 밟는 소리가 나면 싸우라고 한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상대방의 마음이 물처럼 녹는다고 하였다. 고대 전쟁은 심리전이다. 장수가 누가 나오느냐가 결정적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장수가 되어서 나가시는 것이다. 가끔 택한 받은 자가 대행하기도 하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경우가 해당한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여리고성의 무너짐도 좋은 예이다. 미디안의 군사는 항아리를 깨고 소리를 지르니 자기들끼리 지리멸렬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순종에 달려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요, 승패는 여호와께 달렸다.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기준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무조건 승리하는가? 아니다. 고대 신들은 국가 신들이다. 전쟁의 승패의 기준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도덕, 법이 있다. 이 언약에 순종하고, 법 계약에 순종할 때 편드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순종하지 않을 때 여호와의 칼이 이스라엘에 향한다. 아이성 전쟁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녹았다.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했다. 블레셋 전쟁 때는 법궤를 끌고 가도 졌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지신 것은 아니다. 곤 신이 팔다리가 부러지고 망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바벨론 안에서도 전쟁에서 진 이스라엘 신을 우주의 신으로 인정한다. 여호와는 홀로 싸우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의 중심이다.

 

 

멸절(滅絶)전쟁의 원칙과 평화의 복음

 

'멸절전쟁'이란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죽이는 소위 싹쓸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 씨는 이런 이유로 여호와 신은 광야의 깡패 신, 잔인한 신이라고 비하하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멸절전쟁이 아니며, 멸절전쟁에는 원칙이 있다.

첫째, 상대방이 돌이킬 수 없는 악에 들어갔을 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한 심판적 성격의 전쟁이다. 이때는 남녀노소 모두가 사망 아래에 있게 된다. 이 경우에는 저들의 악이 관영했을 때라는 전제가 있다. 가나안전쟁 등이 그런 것이다. 죄악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전쟁인 것이다. 이런 전쟁 때 전유물을 취하면 오히려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하였다.

 

멸절전쟁은 이스라엘에도 임하는 것이다. 면하는 방법은 누군가 대신 죄를 받아야 한다. 전유물을 취한 아간의 멸절로 이스라엘의 멸절이 면한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 대신 멸절 당하셔서 우리에게 멸절이 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멸절 당한 자가 예수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쓰인 저주라는 단어가 바로 구약에서 쓰인 멸절이라는 단어와 동일어이다. 그리스도 이후 멸절은 없어지고, 주님이 대신 멸절받음으로 풀려진 복음이 주님이 재림할 때 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화평의 복음만이 존재하며, 이를 전파하기 위해 교회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구약의 전쟁은 예수의 십자가 저주로 모두 끝난 것이다. 예수 안에 다시는 멸절, 죽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성전(聖戰)을 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오류이다. 함부로 구약을 대입하면 해석적인 명백한 오류가 생긴다. 신약시대에 어떤 경우의 성전도 없다. 이슬람, 유대교에는 성전이 있으나 예수교에는 성전의 개념이 없다. 우리에게는 평화의 복음 전파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과 의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독인은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일체의 성전은 없으나 한 국가시민으로 정당한 전쟁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이 있다. 정의로운 전쟁론이라고 하는데. 어거스틴·아퀴나스·루터·칼빈 등이이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대표적 본문으로 구약을 인용하면,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정당하지 않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구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일정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의 근거는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신약에 보면 세례 요한이 군인들에게 회개의 표시로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강포이 행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 알라고 했다. 군인이나 군대를 중립적으로 본 것이다. 다만 사익을 위해 공권력을 폭력으로 전환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13: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칼의 권세를 국가에 주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권세는 authoritypower가 있다. 이 말씀은 모든 power가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이 아니라, authority가 하나님께 온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합당한 파워여야 한다.

 

기독교인의 저항권을 천명한 것이 이 본문이다. 합당한 권세를 벗어나 사리사욕을 위해 권악징선하면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온 권위가 아님으로 저항해야 한다. 권선징악을 위해 사용되는 검찰, 경찰, 군대 등의 힘은 합당한 권력이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힘이 모두 하나님께로 나왔다고 하며 지지하고, 조찬기도회 등을 열고 한 것들은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인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청교도혁명이다. 영국에서는 반란자라고 했으나 이는 기독교 저항권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는 시민혁명 등의 과정에서 모두 정리된 내용이다. 칼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국가에 준 것이다. 국가는 일반적인 정의에 어긋나면 안된다. 공권력이 폭력이 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내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 악을 행하면 그것을 막기 위해, 침략에 대한 방어로 전쟁을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에는 7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첫째, 정당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침략으로부터의 방어 전쟁이어야 한다.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은 북에서는 해방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침공을 당해 무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둘째, 정당한 의도여야 한다. 복수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라크전쟁은 복수의 요소가 많다. 셋째,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외교, 국제 재판, 국제기구 협력 등을 거쳐야 하는데 이라크전쟁은 이를 생략했다.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 넷째, 합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UN 등의 결의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UN을 무시한 일방적 전쟁인 것이다. 합법적인 것은 UN 주도의 평화군이 가장 합법적 형태이다. 다섯째, 승리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제한된 공격이어야 한다. 일곱째 민간인 공격은 배제되어야 한다. 부시는 제한된 공격으로 민간인 공격이 배제될 것이라 장담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7가지가 정당한 전쟁론인데 역사상 7가지를 만족시킨 전쟁은 한번도 없었다. 관념적, 신학적 전쟁론인 것이다. 왜 신학자들은 정당한 전쟁의 가능성을 주장했는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고 하면서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신학적 이론이다.

 

 

이라크 파병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교회는 국가 이익을 목표로 한 전쟁에 대해 지지, 암묵적 동의를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 평화의 원칙을 견지할 책임, 선지자적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면 교회는 이를 비판해야 한다.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라크 파병은 절대로 지지하거나 암묵적 동의해서는 안된다. 거짓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상 미국의 청교도들은 지나치게 종교적 강박관념을 가져서 극단적인 병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주홍글씨'같은 책이 나온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은 바리새적인 충동에 휩싸여 있다. 부시는 전도, 성경공부도 많이 하는 보수적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보수적 교회가 지지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좋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항상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도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다는데 있다.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대표적으로 1913년 윌슨은 전쟁 담화문에 성경귀절을 담았다. 92년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 선포를 장대한 기도로 마쳤다.

 

베트남전쟁 때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의료 공병부대를 시작으로 88개월 동안 32만여 명을 파견해 전사 4,900여 명, 고엽제 환자 16,000여 명, 엄청난 부상자를 남겼다. 또 한국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다. 평화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다. 국익을 방패로 하는 것은 평화적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국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한번 미국에 끼워 파병하면 미국이 망할 때까지 모든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 이번에 끝내야 한다. 터키 이상으로 단호하게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결단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선지자적 책임이 있다. 모든 전쟁에 젊은이들이 피 흘리고, 타민족에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니라고 할 일상일대의 기회이다. 그만큼 부당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파병 때는 반대여론이 있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단체 등 여론이 갈려있다. 이 때 끝내야 한다.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서 미국이 우리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동북아 정치 경제논리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이루어진다. 파병한다고 봐주고, 안 한다고 안 봐 주는 것이 아니다. 북한과의 관계는 미국 자신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국익 파병론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명분도 없다. 정신 차리고 반대해야 한다.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으로 제한적으로 보내거나 자국민의 환영이 있을 때 가야 한다. 칼빈은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정부 상태라고 했다. 무정부 상태를 막는 것이 필요하다. UN의 승인 하에 평화유지군으로 갈 때 공권력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폭력이 된다. 현재 UN의 결의는 다국적군이지 평화군이 아니다. 현재의 명분으로는 어렵다. 의료, 공병은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도 의료 공병이 시발이었다. 끝까지 반대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의 평화정신으로 선지자적 냉정함을 유지하며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2004.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