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롬 15장 17-19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서론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공의회(예루살렘공의회)는 이방인과 율법이라는 선교적 이슈를 가지고 모였습니다(행15장). 이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공의회를 소집해서 당대의 선교적 과제들을 해결하곤 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선교 역사가 카톨릭보다 1/10밖에 안되는 100년에서 200년 사이의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의회를 소집할 만큼의 중대한 선교적 이슈가 제기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로잔대회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라는 주제가 개신교의 첫 선교적 이슈로 제기됩니다. 그래서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공의회적인 선교대회가 열린 것이 바로 ’스위스 로잔대회‘인 것입니다. 이 대회에서 ‘복음전도와 사회 정의’ 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되었으며 이른바 ‘균형잡힌 기독교(The Balanced christianity)’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로잔Ⅱ 대회에서는 ‘균형잡힌 기독교’를 더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소위 ‘총체적 기독교(The Holistic christianity)’라는 선교 개념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두 선교 개념의 차이를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균형 잡힌 기독교’라는 것은 평균대의 가운데로 정확하게 걸어가는 소위 ‘산술 중간적 노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고, 잘못하면 지극히 관념적이고 양비론적인 중도노선에 빠질 수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총체적인 기독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정의, 양극을 동시에 다 잡는 소위 ’역동적 중도노선‘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정의적인 헌신을 하는 것이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복음전도적인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역의 상황에 따라 복음전도와 사회정의 사이에 그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총체적 기독교‘라는 개념은 훨씬 더 1974년의 로잔정신을 심화시킨 통전적 선교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총체적 복음, 총체적 선교, 총체적 기독교’라는 개념이 1989년 로잔Ⅱ 마닐라 대회에서 선언되었습니다(마닐라선언).
본론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3가지 방식으로 복음을 총체적으로 전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말(Word)'과, 둘째로 ‘일(Deed)'이며, 셋째는 ‘표적과 기사의 능력(Power)이며’ 라고 했습니다.
Ⅰ. 말씀전도(Word Evangelism)
소위 '말씀 선포’라는 방식의 선교인데 이것은 주로 설교, 성경공부, 제자 훈련, 전도폭발훈련이나 셀 교회 운동을 통한 선교사역입니다. 이 방식은 말씀의 은사가 있는 말씀 사역자들이 굉장히 강조하였습니다. 주로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선호하고 헌신해온 방식으로 ‘교회개척선교(Church Planting Mission)'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사들이 이 방식의 선교를 고수하고 있으며, 일부 근본 주의적 경향을 가진 선교사들은 오직 ’복음전도‘만 강조하고, 나머지의 선교방식을 부정하는 다소 이원론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Ⅱ. 행위전도 (Deed Evangelism)
두 번째로는 말과 함께 ‘일(Deed)’, 소위 ‘선한 행위’를 통한 선교입니다. 주로 NGO Mission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이 선호하는 선교 방식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예루살렘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행20:24).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15:25-2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롬15:28)”고 그는 밝혔습니다. 그가 이처럼 목숨 걸고 예루살렘으로 가길 원했던 이유는 소아시아, 그리스의 이방인들이 전해주는 구제물품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구제를 ‘복음의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구제는 ‘동정심의 열매’가 아니라 ‘복음의 열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제대로 복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예루살렘의 유대인 크리스챤들에게 확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루살렘 방문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신학적, 신앙적 갈등을 종식시키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가 서바나로 가려던 복음 전도적 계획을 미루고 먼저 예루살렘을 택한 것은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더 이상 율법 문제로 갈등하는 것으로 인해 생긴 선교적 위기- 즉 ‘초대 기독교의 분열’이라는 위기를 이 구제라고 하는 ‘행위전도(Deed Evangelism)'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선교적 결단이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일’, ‘선한 일’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단순한 ‘휴머니즘’이나 ‘선교적 접촉점’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사실 ‘복음 자체’였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 희년 공동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선교사들도 단순한 사회 복지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것은 복음자체다’라는 자세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문제나, 의료문제, 혹은 임금문제 등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역을 하는 동안에 ‘내가 지금 복음은 전하지 않고 뭐하고 있나?’란 심각한 회의가 자주 찾아오곤 합니다. 이 사역을 소위 ‘행위전도( The Deed evangelism )’란 신학적 확신 속에서 사역 하지 아니하고, 이 사역을 휴머니즘에만 근거하여 행하다보면 언젠가 우리의 인간적 동정심은 바닥나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사역은 점점 피곤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NGO사역자들이 도중에 많이 포기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NGO단체들 속에서도 이 어려운 사역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사역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의 힘으로 감당하고 있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기도와 말씀 묵상에 힘쓰며 성령의 강화력과 감동에 휩싸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으로 사역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Ⅲ.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사도바울은 세 번째로 자신은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Power)으로 사역했다고 고백 했습니다. 선교사역에는 언제나 영적차원이 있습니다. 사단의 방해로 하나님의 역사가 막히는 경우도 있고, 선교 공동체가 분쟁과 분열과 위기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또 선교사나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귀신 들림(god possesion) 현상이나 기타의 수많은 영적현상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까요?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때에 역동적인 기도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권능-즉 이적과 표적 및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가 계속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능력전도(The Power Evangelism)’라고 합니다. 20세기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역사에 있어서 1989년 로잔Ⅱ 마닐라대회는 소위 ‘능력전도’(The power evangelism)에 대해서 문을 연 첫 대회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운동’과 ‘성령운동’에 대하여 신앙적, 신학적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다가오는 21세기를 준비한 대회였습니다. 오늘날 21세기는 이제 이성의 시대(modernism의 시대)를 넘어, 영성과 감성의 시대(post modernism)입니다. 이러한 21세기의 변화는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어느 때 보다도 다시 ‘능력전도(The Power Evangelism)'에 대하여 다시 각성해야 할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는 기도와 성령의 능력에 민감해야 하며 말씀과 행위와 능력으로 무장된 총제적인 영성을 지닌 사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롬15장에서 고백한 사도바울과 같이 21세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말씀(Word)과 행위(Deed)와 능력(Power)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총체성 있는 선교사, 총체적 복음 전도자가 되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2007.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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