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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 하마스

희년선교회 2024. 11. 4. 23:05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 하마스

 

 

 

최 영 철

(건국대)

 

 

 

I. 서 론
II. 하마스의 어원과 생성과정
III. 하마스의 공식 출범과 과격화
IV. 하마스의 이념, 목표 그리고 전략
V. 결 론

 

 

 

 

 

 

 

 

 

 

 

Hamas: the Islamic Resistance Movement in Palestine

 

Choe, Young Chol

Konkuk University

 

Hamas, which is the acronym for 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 (the Islamic Resistance Movement) in Arabic, was born of the first intifada in the 1980s as a wing of the Muslim Brotherhood movement in Palestine.

 

This study explores the formation process of Hamas, its ideology, objectives and strategies, and relates them with the Palestinian and Israeli peace process.

 

Hamas has expanded and strengthened its organizations and influences through its increasing control over the religious institutions of the waqf (religious endowments), the mosques, and educational and social organizations. Concerning Palestine, Hamas denies the Israel's right to exist in Palestine because it argues that the land of Palestine is an Islamic trust (waqf) and Jihad is a duty for Muslims to expel the Jewish regime out of the land. It, therefore, recognizes neither the Oslo Peace Process nor the "Self-rule" of the Palestinian Authority. Hamas, with other radical movements such as Islamic Jihad, has initiated the military and armed actions and terror attacks against Israel.

 

While Hamas has made great gains, becoming a major political force in Palestinian society, it has problems and challenges. It has benefited from being opposition and the failure of the PLO in the peaceful settlement with Israel. One of the most difficult but crucial problems is how to justify its denial of co-existence with Israel and bloody terror attacks against innocent civilians, and convince the Palestinian people and the world.

 

 

 

 

I. 서 론

 

19676일 전쟁이후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정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이스라엘의 점령군 통치에 본격적인 항거를 시작하여 이스라엘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내고 1993년부터 이-팔 두 민족간 평화과정을 출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PLO가 아니라 바로 하마스였다.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과격파 단체 하마스는 198712월 발발한 제1차 인티파다를 주도하였으며, 이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군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을 무력으로 통치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케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정착촌을 건설하여 이스라엘화하는 대 이스라엘’(Greater Israel) 정책의 한계를 노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평화를 위한 영토(Land for Peace)의 교환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1993년 오슬로 평화합의 이후 진행되던 이-팔 평화과정에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비타협 원칙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대 이스라엘 유혈 테러공격을 계속하여 왔으며 이스라엘과 평화과정을 진전시켜가던 PLO를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

 

20009월 시작된 알 아크사 인티파다 이후 이-팔 평화과정은 파국을 맞았으며 이ㆍ팔 양측은 지난 14개월간 전쟁에 준하는 유혈충돌을 계속해 왔으며 지금까지 이스라엘 인 230, 팔레스타인인 780, 1,01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The New York Times, 2001.12.3). 이러한 이-팔 양측간 유혈 충돌 과정에서 대 이스라엘 무장항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마스이다. 2001121일과 122일 양일간 예루살렘과 하이파에서 3차례 연쇄적으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 25명이 사망하는 등 모두 2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번 테러사건에 하마스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The New York Times, 2001.12.3).

 

하마스는 1993년 오슬로 평화합의 이후 이스라엘과의 평화과정이 진척되면서 팔 주민들의 외면으로 한때 침체에 빠졌었으나 최근 이ㆍ팔 평화과정의 교착과 유혈 사태의 악화로 다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9.11 미국 테러 사건 발생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이ㆍ팔 유혈충돌 사태는 하마스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1112일 실시된 요르단강 서안 나블러스의 알-나자흐 대학교(al-Najah University) 학생회 선거에서 하마스를 주축으로 한 이슬람 블록이 60% 득표율로 아라파트 의장이 소속한 파타흐(Fatah) 진영(득표율 34%)을 압도하였다(The Washington Post, 2001.11.13/ The Jerusalem Post, 2001.11.23). 지난 9월 팔레스타인 인들의 정당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러한 추세를 보여주었다. JMCC(Jerusalem Media & Communication Center)9.11 미국 테러 발생 직후인 9.11-9.17 사이에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 1,1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아라파트 의장이 소속한 파타흐(Fatah)당은 응답자의 29.2%의 지지를 받은 데 그친 반면 하마스는 20.7%의 지지를 받았는데 하마스에 대한 이런 높은 지지율은 1994년 이후 최고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하마스의 생성과정과 이념, 목표 그리고 전략을 이ㆍ팔 평화과정과 관련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II. 하마스의 어원과 생성과정

 

하마스(Hamas)’는 아랍어 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 (the Islamic Resistance Movement)의 머릿글자 합성어이며, ‘열심(Zeal)’, ‘열정의 뜻이다. 하마스는 198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에 있는 무슬림 형제단의 하부 투쟁단체로 출범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운동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the Muslim Brotherhood)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점령군 통치에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삼가해 왔었다.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가 인티파다의 폭발과 함께 갑작스럽게 변하게 된다. 아흐메드 야신이 무슬림 형제단의 하부 투쟁조직으로 하마스란 단체를 결성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서 지배적이었던 PLO에 대항세력의 위치로 부상하였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대중들의 대이스라엘 강경입장을 대변하고 격렬한 대 이스라엘 무장항쟁을 주도하면서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특히 가자지구에서 PLO내의 최대 정당인 파테흐(Fatah)와 쌍벽을 이루는 정치적인 운동조직으로 성장했다. 먼저 하마스의 모태가 되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태동과 팔레스타인으로 조직확대 과정을 살펴본다.

 

 

1.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의 태동과 팔레스타인 지부 결성

 

무슬림 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 이스마일리야에서 하산 알 반나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창립은 당시 영국통치하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해보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19세기말부터 진행된 이집트의 서구식 근대화는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노정시켰다.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서구의 침탈과 정치-경제적인 예속 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하산 알 반나는 세속화된 이슬람 사회를 꾸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공동체(Ummah)의 순수한 모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하나인 정교일치의 성격을 지닌 이슬람 국가의 창건을 목표로 한다(손주영, 1998a; 이희수, 1997). 하산 알 반나가 주장하는 무슬림 형제단의 기본이념을 손주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손주영, 1998a: 151).

 

"(1) 이슬람은 포괄적 가르침이다. 종교이자 국가이고 삶의 궁극적 목표이자

방법이며 내세와 현세를 위한 올바른 길이다.

(2) 이슬람공동체는 꾸란에 기초한 초기 이슬람의 순수한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

(3) 범이슬람주의의 깃발이 있는 모든 지역은 이슬람의 와탄(국가)이다.

(4) 칼리파제는 복원되어야 한다.

(5) 이슬람 정부의 수립은 무슬림 형제단의 의무이다."

 

무슬림 형제단 운동은 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계몽적 성격을 띠었었다. 그러나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무슬림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Zilberman, 1996). 반제국주의와 이스라엘 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1948년말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는 암살되었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더욱 극단화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의 관계는 1935년부터 이루어졌다. 알반나는 그의 동생 아베드 알-라흐만 알-반나(Abd al-Rahman al-Banna)를 팔레스타인에 보냈다. 1945년 이들은 예루살렘에 지부를 출범시켰다. 이집트 본부의 지원으로 1947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 25개의 지부가 조직되었다. 이 지부들은 12,000 내지 20,000명의 회원을 두었다. -하지즈 아민 알-후세이니(Al-Hajj Amin al-Husseini)가 이 지역 지도자로 임명되었다(Abu-Amr, 1993).

 

-반나외에 2명의 지도자가 팔레스타인 무슬림 형제단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기성제도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적극적인 반정부운동을 주장했으며 1966년 이집트에서 처형된 사이드 쿠트브(Sayyid Qutb)와 현대 팔레스타인의 첫 무장항쟁의 지도자이며 1935년 영국에 의해 피살된 이즈 알-딘 알 카삼(Izz al-Din al-Qassam)이다(Abu-Amr, 1993). 그의 죽음은 1936-39년 사이에 일어났던 팔레스타인 인들의 대 영국 유혈 항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 하마스의 군사테러조직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후 팔레스타인의 이슬람형제단과 요르단 정부와의 관계는 가끔 긴장관계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1950년대, 60년대 요르단 통치하에서 동 예루살렘과 요단강 서안지구내의 무슬림 형제단은 요르단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을 받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 형제단 회원은 이슬람 종교재단(Waqf)을 비롯 정부의 중요 관직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요르단 정부에 우호적이었으며 사회계층에서도 중산층이며 급격한 사회개혁보다는 점진적인 이슬람 사회건설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사회, 종교적인 성격의 비정치적인 분야에 한정되었다(Zilberman, 1996).

 

반면에 1950년대, 60년대에 가자지구의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와 갈등을 빚고 이 단체가 불법화되었으며 핍박을 받았다(Abu-Amr, 1993). 이집트 정부는 무슬림 형제단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하여 그 일부를 폐르시아만 국가들에 추방시키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과격화되고 지하 운동화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향의 정치조직 파타흐(Fatah)는 가자지구에서 혁명적인 민족 운동을 주창한다. 파타흐(Fatah)1967년 이스라엘의 점령이후 PLO 산하의 다른 정파와 함께 무장항쟁으로 이스라엘의 점령군 통치에 격렬하게 항거하는 투쟁을 펼치면서 지지기반을 급속히 확대하여 가자지구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스라엘의 군정 하에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PLO의 적극적인 투쟁방안이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인들은 PLO의 이스라엘에 대한 타협없는 무장항쟁을 통한 팔레스타인 민족 국가의 창립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PLO의 팔 민족 국가 창건에 대하여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이 시작되었던 7세기 당시 할리파제 형태의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의 창건을 대안으로 제시했다(Zilberman, 1996). 이들은 먼저 아랍 대중들이 이슬람으로 돌아가며, 세속적인 서구 문명에 물든 아랍국가들이 이슬람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 이슬람 사회가 건설되고 모든 아랍국가가 하나로 통합되고 단결하여 팔레스타인의 해방에 나서야하는 데 이러한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대 이스라엘 항쟁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자 지역의 무슬림 형제단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세속적인 이집트 정권에 대한 증오가 거세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보다는 이집트 정부의 전복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2.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에서의 무슬림 형제단 운동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형제단은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이슬람 세계가 항복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서구의 경제적인 제국주의가 이슬람 세계를 포위하기 위해 파견된 전위대로서 암과 같은 존재이며,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일련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이들 아랍국가들이 이슬람에서 일탈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1967년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이스라엘 점령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소위 이슬람 세대의 양육에 주력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팔레스타인에 이슬람 국가의 창건을 목표로 하였지만 먼저 이를 위한 정치조직의 결성과 발전 그리고 사회개혁을 우선했다. 이슬람에 바탕한 가치관이 모든 사회에 깊숙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이러한 조건이 성숙되고 이슬람 국가 창건의 성공을 담보할 때까지 무슬림의 지하드(聖戰)을 연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학교와 자선단체 설립 등 각종 사회복지 사업에 주력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족의 정치적인 독립운동보다는 교육과 사회개혁을 통한 이슬람 사회건설을 우선 했던 것이다(Zilberman, 1996).

 

그러나 이슬람 사회건설과 이슬람 교육 등 이러한 비정치적인 활동은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세속적인 팔레스타인 민족 저항 운동, PLO의 적극적인 무장항쟁을 그들은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요르단 서안과 가자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서 PLO에 대한 팔레스타인 인들의 지지가 지배적인 분위기 하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점차 활기를 띠고 그 세력을 확대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이후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는데 경제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으며 계층간의 소득격차는 벌어지고 이러한 사회적인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증대되었다. 반면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PLO는 다시 튀니지아로 쫒겨 났으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건은 더욱 멀어졌고 현실성이 감소하였다(Hamas, 2001a). 또한 PLO 지도부는 팔 점령지역 주민의 경제, 사회적인 고통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PLO 지도부의 부정부패에 부정적인 인식이 점령지역 현지 주민들 사이에 번지게 된다.

상당히 높은 수준인 이스라엘 국민들의 경제생활과의 비교는 이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경제, 사회적인 곤궁과 박탈감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특히 경제적인 생활향상을 기대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생활을 하면서 고통가운데 있던 가자 지구의 난민촌 주민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사회복지 사업의 혜택을 받으면서 그들의 사회 평등사상에 공감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PLO와는 달리 현지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가 증대할 수 밖에 없었다. PLO는 부정부패의 비난을 받았던 당시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은 비교적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로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Zilberman, 1996).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가자의 무슬림 형제단 내에서 지도력을 구축하던 아흐메드 야신(Shaykh Ahmad Yasin)1973무자마’(al-Mujamma al-Islami, the Islamic Center)를 창립하였으며, 1978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기관으로 승인을 받았다. 짧은 기간에 무슬림 형제단의 관장하에 있던 종교단체와 기관들(가자의 이슬람대학교를 포함하여)이 이 무자마의 관할 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가자지구 무슬림 형제단 활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Abu-Amr, 1993).

 

무슬림 형제단의 조직확대와 함께 무슬림 형제단의 요단강 서안, 가자지구 그리고 요르단의 모든 이슬람 기관들이 1970년대에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 무슬림 형제회(The Muslim Brotherhood Society in Jordan and Palestine)라는 명칭하에 통합된 것 역시 팔레스타인 무슬림 형제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6일 전쟁이후 요르단 강 서안이 요르단 정부 관할에서 이스라엘 군정으로 전환되었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요르단 정부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역내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활동이 역시 강화되었다. 대부분의 활동은 세속적인 사상과 PLO내의 세속적인 민족운동의 영향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고 극히 일부만이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에 반대하는 데 관여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대 이스라엘 무장항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무슬림 형제단의 조직확대를 방해하지 않았으며 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였다. 이스라엘은 무슬림 형제단을 통해 테러 활동으로 이스라엘 정부를 괴롭혔던 PLO를 견제코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오일 달러 수입의 증가로 갑자기 재정적으로 넉넉하게된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산유국과 국제 이슬람 기구로부터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원조가 급격히 증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러한 지원금과 무슬림들의 헌금(Zakat)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구제와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이 단체에서 운영하는 탁아소, 유치원, 그리고 각급 학교에 등록하여 혜택을 받았으며, 국내외 대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다.

 

무슬림 형제단은 또한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각종 이슬람 단체의 재단(waqf)을 점차 관장하게 된다. 이 이슬람 재단들은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고 주민들에게 임대해주고 있다. 가자지구의 경우 와크프(waqf)가 모든 부동산의 10%를 보유하고 있다. 수백의 상가, 아파트, 차고, 공공건물 그리고 2000에이커의 농토를 이 재단들이 소유하고 있고 많은 인력을 고용하게 되었다(Abu-Amr, 1993; Zilberman, 1996).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슬림 형제단이 주민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은 이스라엘 점령이후 급격하게 늘고 있는 모스크였다. Ziad Abu-Amr(1993)1967년 요단강 서안에 400개였던 모스크가 1987750개로 늘었고 가자지구는 200개에서 600개로 늘었다고 주장한다. 모스크는 이렇게 무슬림 형제단이 이스라엘 당국의 방해없이 활동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과 수단이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들 모스크에서 정오와 저녁 기도 후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지지자의 충원에 이러한 모스크를 활용하였다. 1967년이후 많은 모스크가 건축되었으며 이를 운영하고 관리할 성직자와 직원들이 무슬림 형제단에서 충원되었다.

 

1979년 이란의 회교혁명은 무슬림 형제단 운동을 고무시켰으며, 급진적인 이슬람 혁명과 이슬람 국가 창건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혔다(Zilberman, 1996). 이란의 회교 혁명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를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급진적인 이슬람 혁명을 위한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스라엘의 점령군 통치에 대해 온건노선을 유지했던 무슬림 형제단은 198712월 인티파다가 발발하고 하마스가 공식 출범하고부터 강경노선으로 전환하고 대 이스라엘 항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79년 이후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내에서의 무슬림 형제단은 PLO와 지지기반 확대를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였다. 먼저 고등교육기관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 진영과 파타흐(Fatah)를 중심으로 한 PLO 양 진영의 투쟁이 격렬해졌다. 팔 점령지역 일부 대학교 학생회 선거에서 이슬람 진영이 그 이전에도 가끔 우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슬람 진영은 점차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 지지기반을 현저하게 확대시켰다. 1984년 가자의 이슬람 대학교에서는 이들 두 진영간 주도권 다툼이 폭력사태로 악화되었으며 결국 이슬람 진영의 승리로 귀착되었다. 이슬람 진영은 가자의 이슬람 대학교 학생회는 물론 교직원의 임용과 대학 경영권을 장악하였다.

 

무슬림 형제단의 활발한 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점령통치에 항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불만이 있었고 이는 이슬람 지하드(Islamic Jihad)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란 회교 혁명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 형제단내 일부 강경파들이 1981년 무슬림 형제단을 탈퇴하여 대 이스라엘 투쟁에서 좀 더 과격한 노선을 지향하는 이슬람 지하드를 출범시킨 것이다(Zilberman, 1996).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지하드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우선 순위와 이를 위한 행동수단에 선택에 있다. 두 이슬람 단체 모두 팔레스타인 땅이 무슬림의 것으로서 그 온전성을 주장하고 어느 상황, 어떤 조건하에서도 이 땅의 분리나 양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땅의 일부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립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들에겐 이 땅이 팔레스타인 민족, 또는 어느 한 아랍국가의 영토가 아니라 이슬람 전체의 재산이며 성지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무슬림은 이 성지한치의 해방을 위해 생명과 돈을 희생할 것을 요구된다.

이 두 이슬람 단체간의 차이는 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중심성, 이 땅의 해방을 위한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였다. 무슬림 형제단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사회의 이슬람적 변혁을 우선시 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사회개혁 없이 세속사상을 포기하고 이슬람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성전(Jihad)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슬람 지하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유대인이 다수인 유대국가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회의 이슬람화와 이슬람적 개혁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먼저 무슬림이 다수인 이슬람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창건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 이스라엘 성전을 즉시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러 공격 등 자신을 희생하는 모범을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보이면서 그들을 깨워서 이란에서와 같은 대대적인 민중 봉기를 통해 대 이스라엘 지하드(聖戰)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Zilberman, 1996).

 

 

III. 하마스의 공식 출범과 과격화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형제단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스라엘의 점령통치에 대한 항쟁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1987년의 인티파다는 이러한 상황을 일순간에 바꾸어버리고 무슬림 형제단이 대이스라엘 점령통치에 가장 강경하게 항거하는 전위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하마스는 이렇게 인티파다의 와중에서 태어났다. 인티파다는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군점령 통치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민중봉기로 화하고 하마스는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세속적인 성격의 PLO에 대한 대안(代案) 운동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인티파다는 어느 단체의 계획이나 준비, 또는 특별한 정치적인 결정없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PLO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형제단 역시 갑작스런 인티파다의 발발과 그 이후 역동적으로 확대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큰 획을 긋는 인티파다는 하나의 교통사고로부터 시작되었다. 1987128일 가자에서 이스라엘 트럭 운전사가 교통사고를 내어 팔레스타인 근로자 4명이 사망한다(Schiff and Ya'ari, 1990).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 교통사고가 의도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사고를 낸 운전사의 친척이 그 교통사고 이틀 전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의 칼에 찔려 사망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 트럭 운전사가 사고를 내고 4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가자지구 주민들의 대대적인 시위를 촉발했고 이들의 시위는 순식간에 요단강 서안지구로 번져나갔다(Schiff and Ya'ari, 1990).

 

바로 그 다음날 가자의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인 민중시위로 연결시키기 위해 회동했다. ‘무자마의 지도자 아흐메드 야신의 집에서 7명의 이 단체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모임은 이후 인티파가가 확대되면서 정기적인 모임이 되었다.

 

1987.12.14.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점령통치에 항거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처음으로 발행했다. 아흐메드 야신과 다른 지도자들 역시 요단강 서안의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19881월 야신은 예루살렘에 하마스 지부를 설치토록 요단강 서안의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요르단의 무슬림 형제단은 인티파다 민중 봉기에 소요되는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하마스의 창립은 어떤 단회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인티파다에 대한 대처문제로 무슬림 형제단은 내부적인 갈등을 겪어야 했다. 젊은 그룹은 점령통치에 항거하는 봉기에 적극적이었고 기성 지도자들은 사태추이를 관망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인티파다가 확대되고 무슬림 형제단이 이 봉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후에야 해소되었다. 이는 신, 구세대간의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 단체의 이념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예상치 못한 방향과 강도로 인티파다가 진행되면서 야신을 비롯한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이 무슬림 형제단이 인티파다에의 참여를 회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반면, 야신을 비롯한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은 공개적이고 노골적인 이스라엘 점령 반대운동 참여에 반대해 왔기 때문에 인티파다 참여를 갑자기 정당화시키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하마스라는 새로운 조직을 출범시킨 것이다. 만약 인티파다가 실패하면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와의 관계를 부인해서 이스라엘의 보복을 피하고, 성공할 경우 하마스가 산하 단체임을 천명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야신의 아이디어였다. 1988.8.18. 발표된 하마스 헌장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가 자신의 산하단체임을 공식 선언한다(2). 이후 하마스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인티파다의 진행과 함께 PLO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팔레스타인 제2의 정당으로 성장하게 된다.

 

 

IV. 하마스의 이념, 목표 그리고 전략

 

하마스 헌장은 팔레스타인 땅은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무슬림의 모든 세대를 위한 이슬람의 소유로서 이 땅의 포기, 또는 일부의 포기도 해선 안됨(11)을 규정한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은 이스라엘의 제거와 이슬람국가의 창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은 팔레스타인인, 아랍, 이슬람 이 세 요소로 구성되는데(14) 어느 한 요소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 땅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했던 이슬람 제3의 성지임을 강조한다(14). 팔레스타인 땅은 축복된 이슬람의 영토이나 시온주의자들이 강탈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땅을 회복하고 그 땅에서 정복자를 격퇴하는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이 무슬림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을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해석한다. 이는 또한 문명간의 갈등으로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영토의 침탈과 팔레스타인 주민의 추방 등 갈등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Hamas. 2001a).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영토의 어떤 부분도 타협의 대상이 되거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떠날 때까지 싸우기 위하여 모든 팔레스타인 민족은 물론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위한 명령이라고 믿는다. 하마스는 수백만명의 팔 난민 귀환권과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팔 국가 창설을 주장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영토적인 야심 뿐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고 팔 민족의 부와 자원의 강탈을 목적으로 한 현대 제국주의 세력을 뒷받침하는 적대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본다. 팔 민족을 문화적인 전통에서 소외시키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심지어는 지적인 헤게모니로 팔 민족을 탄압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또한 중동의 중간에 위치하여 여러 아랍 국가간의 지리적인 계속성을 깨트리는 도구가 되고 있으며 팔 민족의 자원을 말살하고 민족의 부흥을 위한 그 어떤 시도도 분쇄시키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간주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존 공영을 위한 정체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마스의 지도부는 세이크 아흐마드 야신과 6명의 창립 멤버로 구성되었다. 후에 정치, 안보, 군사작전 그리고 언론등을 담당하는 부서와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하마스의 조직은 PLO의 복잡한 관료체제에 비해서 비교적 단순하다.

 

인티파다가 전개되고 각종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야신 자신을 비롯한 지도부의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투옥과 추방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른 변화가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대이스라엘 항쟁에 대해 지도자 아흐마드 야신 구속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하마스는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군 병사의 납치 등 무장항쟁과 테러로 보복하면서 양측 간 작용 반작용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야신 자신도 19895월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91년 하마스의 군사조직 알-카쌈 연대(Izz al-Din al-Qassam Battalions)가 창립되었고 이스라엘 군인과 유대 정착촌 주민에 대한 테러 공격이 증대되었다. 이스라엘은 199212월 이스라엘군 병사 한명이 이들에 의해 납치되자 415명의 하마스 및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들을 레바논으로 추방했으나 1년후 이들을 다시 귀환시켰다. 이러한 투옥과 추방은 하마스에게 단기적인 타격을 주었으나 곧잘 회복되고 새로운 세대에 의해 충원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1993년 들어 하마스의 대 이스라엘 테러는 아래 <1>에서 보는바와 같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 하마스의 연도별 무장 공격 횟수 (1988.10 - 1994.10)

년 도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테러 횟수 3 6 3 17 48 5

자료: Hamas (2000b).

 

 

하마스는 그의 상급 기관인 무슬림 형제단의 각종 교육, 사회복지, 문화, 종교 기관의 지원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세력 구축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탁아소, 유치원, 각급 학교와 병원, 대학교, 모스크 등이 지원 기관들이다. 각 지역의 대학생들이 물리적인 활동부대 역할을 하고 모스크를 통한 집회와 공공 기관의 임직원을 통한 파업 역시 위력적이다. 다수의 시위대 동원과 기동력이 그들의 무기이다. 1993년 이후 이스라엘과 PLO간 팔레스타인 자치협상이 진행되면서 오슬로 평화과정에 최대의 위협과 타격을 가했던 집단이 바로 하마스였다.

 

-카쌈 연대(Izz al-Din al-Qassam Battalions)는 팔레스타인 과격파 단체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테러단체로서, 계속적인 폭탄테러 활동으로 라빈-페레스 정부(1992-1996)하에서 종종 중동 평화 과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으며 라빈 총리의 암살과 강경파 네탄니야후의 집권을 초래했다. 이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정부만이 아니었다. 때에 따라 PLO와 아라파트 의장에 대한 위협과 대결도 불사하면서 그들을 종종 곤경에 빠뜨렸다.

 

이스라엘 군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장항쟁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하마스의 중요한 전략적인 수단이다.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을 위한 중동 아랍국가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이러한 무장 항쟁은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와 그 영속화를 막는 유일한 대안이며, 탄압에 대한 항거라고 하마스는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무장항쟁은 팔레스타인 인들의 안보 위협을 방지하는 수단이라고 정당화시킨다.

 

하마스는 대 이스라엘 군사공격시 무고한 시민이 살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군사행동 과정에서 시민이 희생되는 것도 사실임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정당방위이며 무고한 팔레스타인 인들의 살상에 대한 보복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공격(armed attacks)에 대한 지지율 (%)

구분 94.11 96.12 97.3 98.7 99.6 99.12 00.2 00.4 00.7 01.2
찬성 58 39 38 44 45 36 39 44 52 77
반대 34 49 54 49 49 55 53 49 43 16

자료: Center for Palestine Research & Studies(1994-2000);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2000); Birzeit University(2001).

 

 

<2>를 보면 19996월 에후드 바락 정부 출범이후 대 이스라엘 투쟁의 수단으로서의 무장공격에 대한 찬성율이 36%까지 내려갔으나 20012월 여론조사에서는 77%까지 상승, 1994년이래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무장공격지지 경향을 보이는 것은 20009월말 알-아크사 인티파다 발생이나 20013월 이스라엘에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 총리의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라, 남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 군의 대 이스라엘 게릴라 전투가 성공을 거둔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언론은 헤즈볼라군의 대 이스라엘 게릴라전 진행상황을 주시해 왔으며 팔레스타인 역시 헤즈볼라 식의 게릴라 전투를 모방하는 것을 거론하였다. <2>에 나타난 바와 같이 바락 전 총리 집권 당시인 20002월 여론조사 때 이미 무장공격에 대한 찬성률이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2000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최종지위협상이 결렬된 직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이 수치는 52%에 달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무장공격에 대한 이렇게 높은 지지율은 대 이스라엘 강경노선을 걸으면서 무장항쟁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하마스의 활동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1993913일 워싱턴에서 서명된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협정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 가장 위험스러운 것으로 하마스는 간주한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고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며, 중동 전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주었다는 것이다. PLO가 팔 민족을 대표할 정통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대표로서 이스라엘에게 이슬람 성지에 대한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PLO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오슬로 합의의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의 점령군 통치를 합법화시켜 주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스라엘 정착촌을 연결하는 도로 건설을 승인해 줌으로써 이스라엘 정착촌을 합법화시겨 준 것을 그 예로 든다(Hamas. 2001a).

 

그러나 하마스는 아라파트 의장이 이끌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군사적인 충돌을 자제하고 있다. 하마스가 팔 자치 정주와 군사적인 충돌을 벌일 경우 이는 이스라엘의 목적과 국익을 달성케 해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마스에 대한 팔 자치정부의 탄압과 자치지역 내에서의 인권유린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하지만 팔 자치정부와의 충돌을 지양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의 협상과 타협을 무산시키고 오슬로 합의를 폐기시키기 위해 팔 자치정부와 무력 충돌을 벌이기 보다는 팔레스타인 인들의민중항쟁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마스에 대한 팔레스타인 인들의 지지도는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10-20%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3> 무응답자와 지지정당이 없다고 응답한 자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전체의 하마스에 대한 지지도는 35-45%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Abu-Amr, 1993). 특히 가자지구에서의 하마스의 지지는 가히 위력적이다. 1994년 아라파트 의장이 해외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가자에 귀환한 이후 두 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파타흐 측이 세 과시를 위해서 대중집회를 통해 2만명을 동원했지만 바로 이어 개최된 하마스의 집회에는 5만명 이상의 군중이 참석해 아라파트측을 압도해 버린적이 있다.

 

 

<3> 팔레스타인 주요정파에 대한 지지도 (%)

구 분 94 95 96 97 98 99 00.06 00.12 01.04 01.09
파타흐 41 41 34 41 33 28 35 35 35 29
하마스 11 11 7 17 13 9 12 19 18 21
이슬람지하드 3 2 1 2 1 2 - 3 5 6
팔 인민전선 4 4 3 2 3 3 2 2 2 4
기타정당 11 3 4 11 8 3 4 1 5 5
지지정당없음 17 21 29 17 29 42 37 28 23 23
무응답 13 18 22 10 13 13 10 12 12 12

자료: JMCC (1994-2001).

 

 

<4> 팔레스타인 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지도자 (%)

구 분 95 96 97 98 99 00.06 00.12 01.04 01.09
아라파트 37 39 38 39 28 32 26 32 24
야 신 6 3 7 8 4 6 12 8 11
샤 피 5 6 4 3 3 4 4 5 2
기타 지도자 18 17 17 14 15 17 17 18 27
지지자 없음 16 20 24 25 41 33 32 28 26
무응답 18 15 10 11 9 8 9 9 10

자료: JMCC (1994-2001).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라파트 의장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지지도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준다. 비록 최근 들어 지지율이 30%이하로 떨어졌으나 경쟁자인 하마스 지도자 아흐마드 야신에 비해서는 199411월 이후 지금까지 월등하게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 수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지도자에 대한 지지율로서 응답자가 각 지도자에 대한 신뢰 정도를 묻는 질문으로 바꿀 경우 그 지지율은 현저하게 달라졌다<4>. 팔레스타인 인들이 아라파트 의장을 신뢰하는 비율(63%)과 하마스 지도자 야신을 신뢰하는 비율(55%)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4> 각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 (%)

구 분 신뢰함 중간정도
신 뢰
불신 의견 없음 무 응답
아라파트 63% 17% 16% 3% 1%
야 신 55 24 14 6 2
샤 피 47 20 14 14 2

자료: 자료: JMCC (1999).

 

 

VI. 결 론

 

하마스의 성장과 성취는 괄목할만하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참여하지 않은 재야 세력 그리고 야당이었다는 잇점이 있었다. 도덕성, 책임문제에서 자유로 왔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이 처한 현 여건 하에서 PLO의 한계와 실패, 점령지역내의 경제적인 곤궁 등에 의존한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의 공존과 공영을 거부하고 끊임없은 유혈사태를 선호하는 하마스의 성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간 평화과정의 실패와 그에 따른 상황의 악화, 그리고 양측 강경파의 득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두 민족간 평화과정이 진척되고 팔레스타인 민족이 독립국가 창설에 성공한다면 하마스의 입지는 좁아진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인권탄압을 비난하지만 팔레스타인 청년들을 자살폭탄 테러에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을 살상하는 테러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것도 하마스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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