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6월]
아비의 마음
장승필 목사
평일 오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날에는 멤버들이 사는 집이나 공장을 방문합니다. 방문을 통해 서로가 몰랐던 부분들을 이해하게 되고 서로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공적인 예배를 통하여 교제하고 관계를 맺지만 개인적인 방문 사역은 이들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바쁘고 피곤하지만 멤버들의 집과 직장을 방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죽거리를 찾아서
말죽거리는 제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그 당시 한창 강남권이 개발되고 있던 지역으로 포장이 되지 않아 불편하게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성화산 기도원이 있었는데, 고등학교시절(1974-76) 기독학생운동( KSCF )간사님과 친구들과 수련회로 자주 다녔던 곳입니다. 고등학교 때에 복음을 만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고 주님께 결단했던 곳으로 나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지역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들이 변화가 되었지만 외국인 형제에게 변화되지 않은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것은 분명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6월10일 Junny 형제가 일하는 서울 말죽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쇠고기 가공업체에서 일하고 있으며 냉동 쇠고기를 분쇄기에 갈아 가공해서 부대찌개용 소시지를 만들어 국내식당에 납품하는 회사입니다. 매일 무거운 고기덩어리를 나르고, 그것을 분쇄기에 넣고 갈아 소세지를 만듭니다. 완성된 소세지를 포장하여 냉동 창고에 냉동시켜 그 다음날 박스에 담아 출하시키는 일입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 항상 긴장을 한다고 합니다.
Jonny 형제 안내로 공장 내부에 들어가 보았는데, 온통 냉동기계로 둘러 있어 한 여름에도 긴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여름에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데 겨울에는 정말 추워 견디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사장님이 공장 옆에다 조그만 방을 마련해 주셔서 동료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필리핀에서 영어와 컴퓨터를 전공한 엘리트 청년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근로자로 계약 기간 3년 동안 일하고 1년 뒤 다시 한국으로 입국했다고 합니다.
2001년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경남 마산으로 입국했는데 그 곳에 있는 공장에서 비인격적인 대우와 폭행에 견디기가 어려워 결국 고민 끝에 친구와 작업장을 이탈하여 서울로 상경했다고 합니다.
Junny 형제(32세)를 만난 것은 2002년 1월 구정수련회 때 입니다. 수련회 참석할 당시 자신의 심적인 상태는 걱정근심에 사로잡혀 방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련회 기간 동안 말씀을 통하여 걱정근심이 사라졌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게 되었고 그 이후 희년공동체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일이 힘들고 피곤하지만 토요일 성경공부와 주일에 교회 출석하여 친구들과 만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매우 기쁘고 즐겁다고 합니다. 최근 키타를 배워 주일 예배 때 찬양으로 섬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며, 7월경이 결혼하러 필리핀에 다녀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최근 그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십일조 헌금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 헌금을 낸다는 것이 이들의 상황에서 그리 쉬운 일은 결코 아닌데, 주님의 은혜로 물질을 나눌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날 밤 Junny 형제와 어떻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에 대하여 말씀을 나눴고, 그가 매일 매일 신앙이 성장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당당하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기도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가리봉을 찾아서
90년 초부터 97년까지 서울 가리봉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메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8년 IMF가 시작되면서 공장들이 외곽지역으로 이동하여 노동자들도 함께 이동하면서 한동안 가리봉은 한산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족과 조선족들이 쪽방을 찾으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족과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술집, 식당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베트남,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필리핀 노동자들이 체류하며 쪽방에 살고 있습니다. 최근 불법체류자들을 단속, 검거하는 바람에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주님의 은혜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복음의 능력과 진보를 위해 이들을 만나 격려하기를 지속합니다.
가리봉에서 알빈 형제(34세)가 일하고 있는 봉제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청바지를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합니다. 그는 봉제공장에서 오랫동안 봉제로 기술을 터득한 기술자라 요즘도 바쁘게 일을 합니다. 사장님에 의하면 “알빈 형제는 성실하고 일을 잘해서 저희 공장에서 환영하며 함께 일한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장님에게 인정을 받고 신임을 얻었습니다.
제가 알빈 형제를 만난 것은 2000년 10월쯤에 구로공단에 있는 E-mart에서 였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여러 필리핀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명을 만나 교제를 했고 관계를 맺었지만 모두들 연락이 두절되었고 현재는 알빈 형제만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빈 형제를 만날 당시 그의 부인인 살리 자매는 임신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희년의료공제회의 도움으로 첫 아기를 무사히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에서 유아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들 부부와 교제의 접촉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그 형제네 집에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습니다.
4년이 지난 2004년5월에 둘째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을 출산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만약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출산하게 되면 한명의 자녀만 출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태어나면 한국에서 양육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녀는 본국으로 보내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출산하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두명의 자녀를 출산하게 되었고 두 자녀 모두 저희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의 신앙생활은 자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알빈 형제의 변명에 의하면 매주 잔업을 해야 하고 잔업이 없는 주일은 친구들이 자기 집을 방문해 주일 예배를 출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이들 부부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이들 부부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의 삶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지난번 수요일 방문을 했는데, 알빈 형제는 저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피터목사님! 저희들이 앞으로 매주 토요일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를 정기적으로 참석할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미싱 소리가 크게 들리는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미싱을 하는 알빈 형제를 보면서 저는 이런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주님! 이 형제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게 해주십시요. 이 형제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면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일주일 내내 노동하며 힘들게 산다고 해도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엄청난 능력과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고 없는 저의 방문에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일빈 형제를 뒤로 한 채 다음 방문 때에는 시원한 수박 한 덩어리 사서 함께 먹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급하게 공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인천 남동공단을 찾아서
6월16일 오후 서울에서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저희 공동체 리더인 Caroy(32세) 형제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2002년 산업연수생 비자를 취득하여 한국에 입국하여 전압기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필리핀에서 전기학을 전공했고 결혼하여 슬하에 7세 된 딸 한명을 둔 가장입니다.
이날 밤, 저는 칼로이 형제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자신은 명목상의 카톨릭인이었고 개신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생활 때는 나쁜 습관에 빠져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고 좋지 못한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중 한분이 교회에 출석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친척분이 계속 다시 저를 교회에 초청을 해 2개월 동안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교회에 자주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2개월째 되던 밤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 성경을 배우게 되었고 목사님이 전도하러 나가시면 항상 목사님을 따라 다니며엠프를 설치하는 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을 알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찬양의 은사를 주셔서 교회에서 찬양사역과 어린아이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봉사를 했습니다.
2003년 1월에 친구를 통해 희년공동체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희년공동체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본국에서 느꼈던 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또래 친구들이 몇몇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매주 인천에서 가리봉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매주 토요일 성경공부룰 통하여 성경을 배울 수 있어 매우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은 희년공동체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이 저에게 주신 은사로 봉사할 것을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96년 필리핀 공동체가 시작된 이래 주로 오래된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공동체생활을 하다보니 노령화 현상을 가져와 정체 현상으로 우려하고 있었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공동체를 찾으면서 공동체에 다시 활기를 띄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Caroy 형제입니다. 그는 필리핀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분으로 주님께서 저희 저희 공동체에 보내 주신분입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찬양사역자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 매주 드리는 경배와 찬양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접해 드리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그네 한분에게 찾아가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봅니다. 저희들에게 주신 아름다운공동체를 통하여 잃은 영혼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잘 대접하는 일은 지속되어야 만 합니다.
희년국제선교교회의 행사 및 소식
1. 5월 17일 재한 필리핀 목회자 협의회 참석했습니다.
2. 5월 23일 마석, 가리봉 식구들은 건강검진을 했습니다.
3, 5월 30일 알빈과 살리부부의 아기가 유아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4. 5월 2일, 6월 6일에 네팔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와 성례 집례를 인도했습니다.
5. 6월 13일 필리핀 독립기념일에 가리봉, 마석 멤버들이 연합구국기도회를 참석했습니다. 재한 필리핀 교회 17개에서 모두 656명이 참석해 주님의 은혜로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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