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4월]
회심자를 얻는 길
이석봉 선교사
선교사역은 건축가의 건축하는 것으로 비교 될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 목수는 다양한 연장으로 가득찬 도구 상자를 가져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목수라도 망치나 톱 등 한 두 가지 연장만으로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없다. 나는 목수 일을 하는 것을 취미처럼 여기며 좋아한다. 지난 가을에도 사무실을 직접 만들었다. 물론 조립식 판넬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조그마한 사무실 한 칸 만드는데도 여러 가지 연장이 구비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작업을 하기 전에 적절한 연장들이 다 있는지 살피는 것은 필수이다. 연장 도구 상자 안에 여러가지 도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나는 그 도구들을 언제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물론 연장을 능숙한 솜씨로 다룰 줄도 안다.
한 무슬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목수와 같이 선교사는 다양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도구들을 적절하고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교사와 목수가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목수처럼 선교사가 비록 다양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고 그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줄 알기 때문에 무슬림을 성공적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것을 간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짐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127:1)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 (벧전3:15)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다. 성령께서만이 무슬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실 수 있고,그들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실 수 있다. 문밖에 서서 끝임 없이 문을 두드리시는 분은 선교사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선교사를 통해서 일하심도 믿는다.
지난 10년간 무슬림 사역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있다. 그것은 한 무슬림이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반듯이 잘 준비되고 유용한 도구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자에게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 동안 얻었던 회심자들의 경우가 모두 그러했다. 여러명의 형제들이 회심을 했지만 한명도 내가 하나님께로 이끌었거나 누군가를 지목하여 내가 문을 두드렸던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지난 3월 방글라데시 방문 때 경험했던 여러 경험들 중 두 가지만 나누려 한다.
최근 1,2년 사이에 방글라데시에도 택시가 많아졌다. 이번 방문 때에도 나는 택시를 많이 이용했는데, 어느 나라나 택시 기사들은 손님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 하는 질문들은 빤하다. 어느나라에서 왔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나에게 일자리를 줄수 없느냐? 등등이다. 한번은 택시기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공교롭게도 그 기사는 나에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우리는 서로의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매일 모스크에 나가서 기도한다는 택시기사에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결혼 2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어서 부인이 몹시 힘들어 하고 있고 자기도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기도하면 알라가 들어줄까요?라고 묻자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나는 적절한 사례로 내 한국 친구도 당신처럼 2년 이상 아이가 없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둘이라고 소개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 볼 것을 권했다. 나의 기도 응답의 사례도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택시 기사는 관심을 표명했다. 무슬림들 가운데도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들이 우리의 기도 원장처럼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기도를 해 주는데 상당히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은 방글라데시 무슬림들은 다아는 사실인지라 당신 ‘삐리’(신유 은사 받은 무슬림)에게 기도 받으러 갈려면 택시 기사월급으로 어렵다. 그렇지만 교회에 나가면 목사님들이 사랑으로 당신을 맞아 줄 것이며 값없이 기도를 해 주는 데, 당신이 사는 웃도라에 기도의 능력이 있는 목사님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쉬는 날 부인과 함께 교회 찾아가 보지 않겠느냐. 그분은 아내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 택시 기사가 교회를 찾아 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것 한 가지는 그가 먼저 내게 종교에 대해 물어 왔을 때 나는 그가 진리를 찾고 있는 무슬림임을 느껴 던 것이다.
두 번째 모빈 칸 교수와의 만남이다.
전주 예수 병원 원장님과 함께 다카의과대학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원장님께서 10년 전 잠깐 교재하셨던 의사가 그곳에 계시다고 해서 사전연락도 없이 찾아갔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사전 연락이 없어도 큰 실례가 되지 않는다. 칸 의사는 방글라데시에서 아주 유명한 의사이셨다. 간 학회 회장이시고 내과 주임 교수인 칸 교수와 교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우리는 칸 교수를 한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카 교수의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한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칸 교수의 차를 타게 되었다. 나의 신분을 밝히자 칸 교수는 당신들 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으셨다. 순간 어떤 대답을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주님이 주신 생각,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말씀드리겠다고 하자 기꺼이 웃음으로 답하셨다. 차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 하는 거리라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교회는 나갔지만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이후 삶은 변했고, 목표도 변하여 방글라데시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고, 나는 이미 구원과 참 평강을 얻었기 때문에 이 일들을 감사함으로 수행 하고 있다는 간증을 했다. 학식 있는 무슬림 앞에서 개인적으로 나의 신앙을 간증하는 것은 내 일생 처음이었다. 정말 나는 감격하며 간증을 했다. 칸 교수는 나의 간증이 끝나자 정색을 하면서 당신같이 영적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기는 구원을 위하여 남은 삶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 계획이라고 하셨다. 동료의사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칸 교수의 태도를 보며 하나님께 매우 감사했다. 귀국하기 전 나는 칸 교수를 다시 한번 찾아갔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남은 생을 드리겠다는 그분이 매우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택시 기사나 모빈 칸 교수에게 나는 내가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람으로 기억되어 지기를 바랬다.
한국의 이슬람 선교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인 것 같다. 이슬람 사역에 대한 이론들은 많은데 실재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과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송우리 센터 사역들
송우리 예배(방글라, 베트남, 영어) 모임과 조합, 주간 신문 발행 등 큰 변화 없이 사역들을 진행되고 있다. 귀국한 방갈리들을 위한 현지 모임은 일단 장소를 마련하고 두 명의 방갈리 형제들이 일을 시작하였다. 두 명 다 무슬림에서 회심한 형제들이다. 올 한해는 준비하는 기간으로 하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활동들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데, 6월경 지구촌교회 형제 한명이 단기로 방글라데시 센터에 가게 될 것 같다. 방글라 찬송집을 새로 발간하였고, 생활방글라(문법) 책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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